[베이징=박영서 특파원]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ADIZ)을 선포한 뒤 강공으로 일관하던 중국이 저강도 대응으로 선회하고 있다. 미국과의 정면 대치를 피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는 숨고르기 양상이다. 대신 일본을 주목표로 삼아 전방위적 압력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美와는 싸울 생각 없다=미국과 정면 대치하게 되면 중국이 추구하는 신형대국 관계 구축은 물론 동북아의 안정도 안갯속으로 빠져들 우려가 있다. 중국으로서는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을 기정사실화하는 게 우선이다. 때문에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싸고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이득이란 판단이다.

이번 미 B-52 전략폭격기의 방공식별구역 비행을 놓고 중국이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도 이같은 전략의 하나로 해석된다. 중국이 전투기 긴급발진(스크램블)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미국과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남중국해 훈련을 위해 26일 칭다오를 떠난 항공모함 랴오닝호의 항로를 대만해협으로 변경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중국의 이런 대응은 27일 열린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종이호랑이’라는 지적을 불러왔지만 장기전을 염두에 둔 ‘숨 고르기’ 차원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29일 베이징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미국은 물론 한국까지 반발하는 상황에서 사태가 확산되면 중국 외교는 벽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면서 “미국과 직접 대결을 벌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일본에 집중한다=중국은 갈등전선을 확대하려하기보다는 일본과의 싸움에 집중할 공산이 크다. 현재 중국 권부의 주류는 대 일본 강경파들이다. 이들은 일본을 전방위로 압박해나갈 것이고 이렇게 되면 중국과 일본 간 ‘치킨게임(chicken game)’이 예상된다.

중국은 정치·군사적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일본을 몰아붙일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일본 항공사들의 타격이 우려된다. 전일항공(ANA)과 일본항공(JAL) 등 일본 항공사들은 일본정부의 권고에 따라 지난 27일부터 중국측에 사전통보없이 중국의 방공식별지역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만약 중국이 이를 빌미로 일본항공사들의 비행을 막아버린다면 경제적 손실이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설정한 방공식별지역을 통과하는 ANA, JAL 항공기는 매일 30여편에 이른다. 이들은 주로 대만과 홍콩을 오간다.

또한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엔화 환율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시장참가자들은 중국과 일본이 타협의지를 보이지 않아 긴장상태가 언제라도 격화할 수 있으며 이는 엔화환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일본과 외교적 해결책도 모색하는 ‘투 트랙’ 전략도 구사중이다. 29일 교도통신은 중국이 일본 측에 쌍방 군용기 간 예기치 않은 충돌사태를 피하기 위한 공중 위기관리 체제의 구축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소식통들은 중국의 탕자쉬안(唐家璇) 전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전날 베이징에서 일본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 전 외상과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전 자민당 부총재 등 전·현직 의원들을 만나 이같은 의견을 내놓았다고 전했다.

교도통신은 탕자쉬안의 제안이 중국이 방공식별구역을 기정사실로 하려는 속셈이 있다면서 앞으로 외교 경로를 통해 정식으로 일본에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외교가는 다음달초 예정된 조 바이든 미 부통령의 한중일 3국 순방이 이번 사태의 1차 고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있다. 중국은 이번 방중을 계기로 사태의 전개방향을 외교전으로 바꾸면서 장기화에 대비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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