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성년식’은 촬영 후 회식에서 콜라 대신 놓인 소주 한 잔이 다였다. “맥주는 버겁고 소주가 맞는다”고 했다. 여전히 아이돌그룹의 댄스에 환호를 할 나이지만, 대신 그녀는 공연장에서 무소그르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듣는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모차르트는 ‘천상의 소리’, 베토벤은 ‘고뇌와 환희의 음악’이라고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늘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를 귀에 꽂는다. 3년전엔 핑크 플로이드와 킹크림슨, 카멜, 토토, 퀸 등 70~80년대의 ‘올디스’를 줄줄이 읊던 그녀였다. 일본 고전 영화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꽁치의 맛’을 보면서 빠져들었고,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으며 영감을 받았다. 그녀는 이제 갓 스물이다. 영화 제목을 살짝 빌자면 요즘 또래 같지 않은 ‘수상한 20대’다. 영화 ‘수상한 그녀’의 주연 심은경(20)이다. 미국에서 고교 유학 생활을 막 시작했던 2011년 ‘써니’ 이후 근 3년만, 한겨울 추위가 매서웠던 지난 13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심은경은 “예뻐졌다”는 덕담을 “요새 외모가꾸기에 노력을 하고 있다”는 웃음으로 받았다.
“미국 유학 중인 지난해 봄에 뉴욕에서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읽고 나서는 부담감이 들었죠. 내 나이 아직 스무살도 안 됐는데, 어떻게 할머니 연기를 할까. 그 연륜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할까 하지 말까 고민하다가 한번 더 읽었죠. 클라이막스에서 다시 한번 감동이 왔어요. 이 장면 하나로도 내가 출연할 이유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상한 그녀’(감독 황동혁)는 젊은 시절 남편과 사별하고 억척스레 아들 하나 잘 키워놓고 말년을 보내던 70대 할머니가 ‘청춘사진관’이라는 정체모를 곳에서 영정사진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나온 후 20대 ‘꽃처녀’의 외모로 바뀌면서 일어나는 소동을 그린 영화다. 70대 그대로는 나문희가, 20대 외모의 할머니역은 심은경이 맡았다. 영화 전반부 일명 ‘뽀글파마’에 펑퍼짐한 ‘아줌마 의상’차림의 심은경은 욕설과 육담이 반인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폭포수처럼 쏟아놓는다. 객석에선 ‘쟤 스무살 맞아?’라는 절로 나올 정도로 넉살과 능청이 기가 막힌다. 솜털과 애기살이 아직 뽀얀 얼굴로 낯빛하나 한 변하고 “남자는 말여, 처자식 안 굶기고 밤일만 잘 하믄 (되야)”이라거나 “하여튼 사내놈들은 아랫도리가 문제여, 한 토막도 안되는 것 때문에 뭣허러 인생을 X지나(망치나) 몰러”라고 할 때는 객석이 뒤집어진다. 영락없이 나문희로 빙의된 심은경이다. ‘써니’에서도 맛깔스럽게 보여줬던 전라도 사투리. 몇 년쯤은 그곳에서 살아봤을 법도 할텐데, 지방이라곤 서울살이 전 10살 무렵까지 강릉에서 살았던 게 전부다. 전라도 사투리에 관한한 ‘써니’ 때는 배우 이한위가 ‘교관’이었지만 이번에는 나문희가 ‘교과서’였다.
“나문희 선생님께서 촬영 초반 찍어놓으신 영상을 매일 메일로 받아서 연습했지요. 선생님 전매특허같은 (호탕한) 웃음소리가 가장 따라하기 어려웠어요.”
이번 영화는 성년이 된 후 처음 연기했고, 처음 개봉하는 작품이다. 심은경은 “아역배우를 벗어나 성인 연기자로서 제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성년 데뷔작일 뿐 아니라 ‘써니’ 촬영 후 떠났던 3년여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돌아와 찍은 첫 영화로서도 심은경에겐 뜻깊은 영화다. 3년여전 만났을 때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던 미국행이었다. 심은경은 피츠버그의 한 고교를 다니다가 도중에 뉴욕의 ‘프로페셔널 칠드런 스쿨’(PCS)로 옮겨 졸업했다. PCS는 다양한 예술계에서 이미 직업적인 활동을 시작한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다.
“예술적으로도 눈이 커지고 시야가 넓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유학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어요. 차별과 외로움, 언어소통에 어려움을 겪었죠. 영어를 다지기 전에 가서 1년여간 힘든 기간을 보냈고, 그러다보니 학업을 따라잡기 어려웠죠. 다양한 인종이 있다보니 알게 모르게 차별도 있고, 미국 우월주의도 은근히 만연돼 있어요. 점점 자신감이 떨어졌어요. 뉴욕에서는 더 심해졌죠. 제가 너무 작은 존재라는 자괴감이 들다 보니 연기를 했다는 사실 자체도 망각했어요. 겨우 졸업하고 심신이 지친상태에서 한국에서 촬영을 했는데, 서서히 제 자신을 찾아갔습니다. 연기가 이렇게 저를 행복하게 하는데 왜 잊고 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슬프고 아픈 기억과 상처가 많지만, 제가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될거라 믿어요.” 미국에선 링컨 센터나 크고 작은 극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재즈, 연극 공연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70~80년대 아트록에 꽂혀 있던 귀는 클래식과 재즈에 새롭게 매료됐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새로운 영감이 돼 틈틈히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연출에도 도전하고 싶다는 심은경은 “당대 평범한 이들의 삶과 일상에 천착해 잔잔한 감동을 끌어내는 작품”이 자신을 매료시킨다고 했다.
20대를 맞은 심은경은 고민이 많다. 당장 대학 진학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인지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소속사에선 “한국의 맷 데이먼”으로 지향점을 두는 것이 어떠냐는 조언도 했지만, 심은경은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잘 안다”고 했다. 그녀의 남다른 감각과 고민이야말로 개성을 뽐내는 수많은 젊은 스타들 중에서도 새로운 세대의 초상으로서 여배우 심은경에게 기대를 품게 하는 이유다.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