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양대근 기자] 차명거래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이 오는 29일부터 전격 시행되면서 자산가들의 ‘뭉칫돈’ 이동도 빨라지고 있다. 눈에 잘 띄는 은행 예금 대신, 금ㆍ현찰ㆍ미술품 등 세금을 피할 수 있는 자산에 대한 선호가 뚜렷해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들 비과세 자산이 지하경제를 오히려 키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커지는 ‘금ㆍ현ㆍ미’ 시장…저금리ㆍ강달러도 한몫 = 27일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6월부터 10월말까지 10대 시중은행의 잔액 1억원 이상 개인 계좌에서 인출된 돈은 약 484조5000억원에 달했다.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22.5%(89조원)가 더 빠져나간 금액이다. 지난 5월 국회에서 금융실명제법이 통과된 이후 자금 이탈 현상이 두드러진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금ㆍ은ㆍ미술품 등 비과세 자산 시장은 급격히 커지고 있다. 한국거래소가 운영하고 있는 금 현물시장(KRX금시장)에 따르면 지난 6월 65.44Kg였던 월별 금 거래량은 이달 들어 26일까지 176.44kg을 기록하며 3배 가까이 급증했다. 실버바 판매량 역시 올 4월 470㎏에서 10월 980㎏로 두 배 가량 늘어났다.
미술품 시장의 성장도 눈에 띈다. 올해 6월과 9월 국내 양대 경매시장(서울옥션ㆍK옥션)의 낙찰총액은 각각 88억원, 163억원으로 지난해보다 크게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정기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작년과 비교해 국내 미술시장이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다”며 “한국 미술품에 대한 저평가 매력이 여전하고, 정부가 ‘미술 진흥 중장기 계획’을 발표하는 등 향후 국내 미술품 시장은 더 커질 것”이라고 관측했다. 역대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금리와 계속되는 강달러 현상도 이런 분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예ㆍ적금 금리가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내려가면서 현금 보유에 대한 부담감이 낮아졌고, 달러화 강세로 금과 은 가격이 4년 반만에 최저치까지 급락한 점도 금 소비가 늘어난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자산가들의 현물 자산 보유가 늘어나면서 개인 금고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다.
강남 대형 증권사의 한 프라이빗뱅커(PB)는 “차명거래 금지를 앞두고 현물을 보유하려고 하는 자산가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 “시중에 돈이 안 돈다” 지하경제 활성화 우려도 높아져=이처럼 자산가들의 자금이 꼬리를 감추면서 ‘돈맥경화’와 지하경제 활성화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5만원권 품귀 현상’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2년 61.7%에 달했던 ‘5만원권 환수율’은 올해 3분기 기준 19.9%까지 급감했다. 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5만원권 환수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면서 “뇌물 등 음성적인 부의 축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실명제법 개정의 취지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해서 세수를 늘리자는 뜻이었다”며 “당초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금융당국이 자산가들의 자금 흐름을 예의 주시하고 이에 대한 후속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