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원 교수가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의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박해묵 기자
배정원 교수가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의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박해묵 기자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결혼 견적서 작성해 주세요."

신혼부부가 아니다. 대학생들에 이 같은 과제를 내는 교수가 있다. 인기는 폭발이다. 수강신청이 3초 만에 마감된다. 이른바 '광클 수업'으로, 빛의 속도로 클릭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그가 운영한 유튜브 채널은 19금 방송으로 ‘노란딱지’도 달린다.

‘결혼의 종말’을 예고하면서도 '인생의 동반자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배정원 대한성학회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세종대 교양수업인 ‘성(性)과 문화’ 강의로 수 천 청춘들의 연애 라이프를 구제한 그를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난 10일 종로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내년엔 솔로탈출을 꿈꾸며 ‘솔크(솔로 크리스마스)’를 감내한 MZ세대에게 한줄기 이정표가 되기를.

연애: 결혼 전 30명을 만나라고요? 대체 언제부터요!

tvN '유 퀴즈 온더 블럭'에 출연한 배정원 교수(가운데). [tvN 방송 캡처]
tvN '유 퀴즈 온더 블럭'에 출연한 배정원 교수(가운데). [tvN 방송 캡처]

기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배 교수는 연애 상대로 30명도 적다는 지론을 펼쳤다. 만나자마자 꽂혀서 운명을 만들려 하지 말라는 직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결혼 자금으로 부모에게 1억원을 넘게 받으면 현관문 비밀번호 알려줘야 한다"고 촌철살인을 날렸다. 최근 공분을 산 데이트 폭력에 대해서는 "사전 징후가 있다"며 "소유욕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거부하는 행동"이라고 진단했다.

배 교수의 사무실은 교수의 서재라는 경직된 느낌보단 인문학을 사랑하는 상담가의 아늑한 아지트에 가까웠다. 자연스럽게 2030세대의 연애·결혼관에서 젠더갈등, 데이트폭력에 이르는 사회문제까지 '신박한' 토크가 이어졌다. 1시간 예정된 인터뷰는 3시간을 훌쩍 넘겼다. 때론 수다 떨듯, 때론 냉혹하게. 다음은 일문일답.

▶'30명은 만나보라'니 대체 언제부터 세는 건가요?

=인생이 바쁘고 힘들어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사랑이다. 취업준비를 해야하니까 '취업할 때까지 연애를 미뤄야지' 하고 생각할 게 아니다. 중학교 때부터 10년 이상 연애를 한다고 치면 30명은 만날 수 있다. 꼭 사귀는게 아니더라도 얕게도 만나고 깊게도 만나면서 사람들과 관계 맺으면서 누가 나랑 맞는 지를 봐야 한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서 첫술에 배부를 생각 말고, 나랑 맞는 사람이 누군지 잘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운명을 믿지 말아라. 나 자신의 보는 눈을 믿어라!

▶비혼주의도 많은데요.

=학생 중에도 적지 않다. 왜 그렇게 살고 싶냐고 물으면, ‘남을 위해 투자하고 싶지 않다’, ‘나한테 투자하는 게 행복하다’고 한다. 그럼 그렇게 너 하나에게 투자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거냐고 다시 물어본다. 50평짜리 집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면 행복해질까?

[tvN '유 퀴즈 온더 블럭' 방송 캡처]
[tvN '유 퀴즈 온더 블럭' 방송 캡처]

▶비혼으로 누리는 행복은 ‘진짜’가 아니란 말씀은 아니겠죠?

=굳이 결혼하지 않더라도, 진실한 인생의 동반자가 있다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비혼의 삶이 쉽고 편한 길만은 아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정의한다. 나 이외에 투자하고 싶은 동반자의 존재가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도 알려주고 싶은 거지.

▶최근 데이트 폭력도 심각합니다. 잘 만나는 것보다 '잘 헤어지는 것'이 더 중요해졌는데요.

=데이트 폭력 사건 증가는 새로운 세대의 성인지 '민감도'가 반영된 결과다. 성 인지 감수성 상승으로 신고 사례도 늘고, 성별 갈등이 확대되는 만큼 실제 마찰도 늘어나는 거다. 데이트 폭력은 상대방을 힘으로 제압하고 우습게 보는 행동이며, 소유욕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데이트 폭력, 개인이 할 수 있는 대처는 무엇인가요?

=데이트 폭력은 피해자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래서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성인지 감수성 높은 판례 등이 중시된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예방이 최선이다. 처음엔 관심이라 생각하기 쉬운 징후들이 있다. 어딜 못 가게 하거나 누구를 만나지 못하게 간섭하거나, 나의 기호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잘 아는 게 대표적이다. 애인이 아닌 친구나 가족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 다른 일을 하거나 학원 등 자기개발 하는 시간조차 질투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손아귀에 들어오면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냐' '왜 이렇게 살이 쪘냐' 등 조롱을 하고 아주 사소하게 화를 내는데 어떤 때 화를 내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때 내 감정을 믿어야 한다. 내가 불편하면 불편한 거다. 희생양을 자처하지 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않다.

결혼: 사랑은 없고 거래만 있다?

배정원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결혼과 결혼 관련 문화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해묵 기자
배정원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해 결혼과 결혼 관련 문화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해묵 기자

▶단도직입적으로 결혼, 해야 하나요?

=결혼제도는 원래 부의 세습 과정이다. 일부일처제는 적자에게 상속하고 싶은 재산이 생기면서 시작됐다. 결혼은 태생부터 사랑이 아닌 계약인데 그 제도가 쇠퇴한다고 아쉬워 해야 하나? 코로나19로 인해 향후 결혼과 결혼 관련 문화는 빠르게 축소될 것이다. 결혼이 사치재가 되고 동거 형태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국가에서 해야할 일은 사실혼을 위한 복지다. 혼외자 등 결혼제도 밖에서 나온 소위 ‘사생아’라 부르던 아이들에 대한 시선도 바뀌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공동상임선대위원장에서 사퇴한 조동연 씨 아이의 신상을 파헤치는 사회는 얼마나 잔인한가. 갈 길이 멀다.

▶20대 남성 사이에선 '설거지론', '퐁퐁남' 등 결혼 비관론도 나옵니다.

=청년들이 결혼에 대해 자조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안타깝다. 설거지론은 ‘신포도(이솝우화 속 여우가 포도를 따먹으려 하지만 손이 닿지 않자 신 포도라며 그냥 지나친 행동에 빗댄 말)’ 측면이 많이 부각됐다. 실제로 1980~1990년대 한때 여자 100명당 남자 인원이 116.5명까지도 늘어나면서 일부 남성들이 결혼 기회를 잃게 된 현상과 관련 있다고 본다. 가뜩이나 남자가 더 많은 결혼시장에서 결혼비용까지 상승하니 일부 청년들에겐 더욱 가혹해졌다. 잔존하는 성별임금 격차 역시 고임금 남성에 대한 선호도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고.

▶조건 중심의 동질혼 말이 많습니다. 비슷한 사람이 더 잘 통할 것이라는 기대감보다 손해보지 않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는 듯 한데요.

=진심을 믿기가 어려워진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상대의 진심을 못 보고 못 찾으니 '돈이라도' 보자며 내몰린 선택지가 아닐까. 이 시대에도 사랑을 믿는 청년들이 분명히 있다. 젊은 학생들을 직접 만나는 사람이니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겠지. 이런 청년들을 위해서라도 사회의 획일적 접근방식을 바꿔야 한다. 우리가 부동산 정책은 주구장창 얘기하지만, 주거정책에 대해 밀도 있는 얘기를 해본 적이 있던가? 어디서든 돈 얘기만 하는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혼테크’ 아귀 맞춰서 결혼한다고 쳐보자.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는 부부는 결국 이혼한다.

배 교수는 자녀의 배우자를 만나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생의 가치들을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박해묵 기자
배 교수는 자녀의 배우자를 만나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생의 가치들을 물어보고 싶다고 했다. 박해묵 기자

▶학생들의 ‘결혼견적서’는 어떤가요? 덜 물질적인가요?

=학생들의 사고는 생각보다 유연하고 현실적이다. 일주일간 결혼식과 신혼여행에 들이는 4500~6500만원의 돈은 취업하고 몇 년을 모아야 하는 돈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면 학생들의 생각이 많이 바뀐다. 신혼여행도 처음엔 유럽이나 하와이는 가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예산을 뽑고 나면 ‘그냥 베트남이나 대만으로 갈게요’하고 수정해서 오는 식이다. 일주일 왕자 공주 놀이에 그만큼 지출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부담이 많이되는 신혼집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원룸에서 시작하는 게 뭐가 잘못됐냐는 얘기도 한다. 집은 재산가치가 아닌 둘이 함께 할 공간으로 접근해야 한다.

▶MZ세대가 독립적이지만, 결혼 만큼은 부모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돈을 쓰는 만큼 보상심리가 생긴다. 나는 학생들에게 ‘부모에게 받는 돈이 1억 원을 넘어가면 너희는 부모에게 현관문 비밀번호까지 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 집에 일주일에 한번씩 가서 이불과 커튼 빨래를 해야 된다고 하는 거다. 부부가 양가의 간섭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면 최대한 본인들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기성세대는 결혼 자금을 부모에게 기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주거 복지정책의 문제, 청년실업의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테고.

▶그럼, 교수님은 자녀가 배우자 데려오면 뭘 보실건가요?

=성격이 긍정적이고 밝은 지 보고 싶다. 우리 자식을 많이 좋아해야 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보이면 좋을 것 같다. 이건 꾸며서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생에 대한 가치들을 물어보고 싶다. 그런데 다른 부모들은 안 물어볼 것 같다. (웃음)

결혼 그후: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라.

영화 ‘미나리’ 스틸컷. 남편의 사업 시도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한 미국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담았다. 배우 스티븐 연(왼쪽)과 한예리가 부부로 출연한다. 배 교수는 결혼생활과 관련해 ‘나를 끌리게 한 것, 그것이 없어져도 저 사람 옆에 남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남편의 사업 시도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한 미국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담았다. 배우 스티븐 연(왼쪽)과 한예리가 부부로 출연한다. 배 교수는 결혼생활과 관련해 ‘나를 끌리게 한 것, 그것이 없어져도 저 사람 옆에 남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결혼도 어렵지만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가사분담이 안 되면 섹스리스로도 이어진다. 상대방이 너무 도와주지 않으니 항상 피곤하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꼴도 보기 싫다' 는 감정이 드는 거다. 일부 상담 사례 중에는 가사 분담이 솔루션인 경우도 많다. 누가 어떤 일을 할 지 규칙을 정하라고 조언한다. 이때 중요한 게 뭘까? 합리적 배분? 틀렸다. ‘내가 이 일을 하면 나랑 편하게 앉아 이야기할 시간이 생기겠구나’라는 마음이다. 배려가 아닌 손해라고 생각하면 행복할 수 없다.

▶건강한 결혼생활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꼽는다면?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아는 거다. 사랑의 모습은 변한다. 서로 열정에 빠질 때 모습으로 계속 가면 감정 롤러코스터라 미칠 거다. 사랑은 책임, 신뢰, 돌봄이 쌓여가면서 편안해지고 단단해진다.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이라고 하기도 하고. 돌보고, (돌봄을) 해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결혼을 해야 행복하다고 가르치시나요?

=내가 끌리는 것들은 언젠가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란 점을 강조한다. 외모와 재력,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이 영원할 것 같아도 언제든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잘생기고 예쁜 외모? 사고로 화상이라도 입으면 끝이다. ‘나를 끌리게 한 것, 그것이 없어져도 저 사람 옆에 남을 것인가’하는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돈으로도 예를 들어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이혼하는 부부도 있지만 오히려 난관 앞에서 똘똘 뭉치는 가족도 있다. 그 차이를 좌우하는 건 서로가 쌓아온 관계 아니겠나. 사랑과 존중. 이거, 형이상학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못 다한 이야기: 이대남과 정치

배정원 교수는 "남녀의 경향성과 고정관념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해묵 기자
배정원 교수는 "남녀의 경향성과 고정관념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박해묵 기자

▶수년간 ‘성과 문화' 강의를 해오시면서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느끼시나요?

=15주간 만나는 대학 강의보다 일회성 강연에선 확실히 느낀다. 여자의 불공정, 남자의 불공정에 대해 균형을 잡고 얘기하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몸의 구조와 기능이 다르고, 심리적으로도 다른데, 그런 차이점을 언급하면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라는 비판이 들어오는 거다. 경향성과 고정관념의 차이를 구분해야 다음 논의가 가능한데 쉽지 않은 일이 됐다.

▶학생들 대부분이 '이대남'입니다. 특성을 꼽는다면?

=성별갈등 지형도에서 불만 많은 20대 남성들이 역설적으로 가장 '성인지 감수성' 높은 세대다. 욕은 하면서도 어떨 때 문제 되는지 누구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세대다. 문제는 인식과 실천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노’가 갈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배정원 세종대 교수가 10일 서울 종로구의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박해묵 기자
배정원 세종대 교수가 10일 서울 종로구의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박해묵 기자

▶내년 대선이 임박하면서 정치권에서 성별갈등을 표심잡기 전략으로 쓴다는 우려가 큽니다.

=당장 표를 얻을지는 모르지만 혐오를 조장하는 무서운 행동이다. 20대 학생들이 정치권이 조장하는 성별·세대·지역 갈등 구도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치권이 조장하는 세대나 성별갈등 구도를 타파해달라. 청년 세대가 힘을 똘똘 뭉쳐서 기성세대의 불공정을 쳐부수는 모습을 보고 싶다.


kacew@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