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포통장 〈2부 - 범죄자 낙인 〉 ①

보이스피싱 ‘무죄’ 받았지만…신경안정제는 못 끊는 이유 [인간 대포통장]
지난달 최윤서 씨가 취재팀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재원 사진작가

‘저 죽을 테니까 사건 종결시켜 주세요.’

지난해 4월 어느 날 최윤서(31·가명) 씨는 경찰 수사관에게 이런 문자를 보내고 사라졌다. 그날 경찰서 2곳에서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혐의로 조사받은 이후였다. 집(울산)으로 내려가는 대신 수원에 있는 선배의 집으로 향했다. 만취하도록 소주병을 비우고 수면제를 입에 털어넣었다.

문자를 받은 수사관은 신병 확보에 나섰다. 수원 관할 경찰들이 그의 소재를 찾아냈다.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정서 상태가 위기 수준이라고 판단한 경찰은 정신건강센터 상담사까지 호출했다. 아들이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으로 잡혔다는 소식은 울산에도 알려졌다. 어머니와 이모가 차로 4시간 반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다.

취재팀은 지난달 울산에서 최씨를 만났다. 취업준비 과정에서 보이스피싱에 연루됐고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미래 계획이 완전히 달라졌다”면서 연루된 배경과 검거 이후 경험한 충격, 심리 변화 등을 자세히 들려줬다.

익명의 제안

보이스피싱 ‘무죄’ 받았지만…신경안정제는 못 끊는 이유 [인간 대포통장]
은행 ATM. 최재원 사진작가

최씨는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했다. 2019년 늦깎이 졸업을 하고 제약회사 품질관리 직군 일자리를 찾았다. 면접에서 5번 떨어질 정도로 취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울산에서 제약회사 공장이 밀집한 경기도 화성까지 면접을 보러 가면 교통비, 식비로 20만~30만원이 깨졌다. 통장 잔액은 속절없이 줄어들었다. 그는 어려운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 없었다. 울산 현대차 하청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쓸 돈을 모았다. 그러다가 돈이 급해 사채(일수)를 100만원 빌린 적도 있다.

그는 지난해 1월 한 온라인게임을 시작했다. 그에겐 휴식이자 잠깐의 도피처였다. 거기서 ‘김 형’을 만난 건 게임을 시작하고 두 달쯤 지나서였다. 어쩌다 들어간 길드(온라인게임 사용자들의 모임)에서 만난 그는 “대부업체에서 일한다. 무슨 일 하느냐”고 말을 걸었다. “취업준비 중”이라고 하자 며칠 뒤 솔깃한 제안을 했다. “회사가 ‘파인대부’라는 곳인데 인터넷 검색하면 나와. 내가 거기서 인사권이 있는데 비정규직으로 3개월 일하다가 정규직 전환 조건으로 일해보겠어?”

일수대출을 써본 최씨는 채권 추심업무로만 여겼다. ‘김 형’은 월급 300만원, 두 달에 한 번 상여금도 나온다고 했다.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대면 면접을 하기로 했으나 “우리 직원이 코로나 확진이 됐다. 다른 직원들은 자가격리 중이니 일단 인턴으로 몇 건 진행하다가 정규직 채용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악몽의 시작

보이스피싱 ‘무죄’ 받았지만…신경안정제는 못 끊는 이유 [인간 대포통장]
최씨는 현재 변호인의 배려로 법률사무소에서 법률사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변호사 덕분에 은둔생활을 관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재원 사진작가

‘인턴 신분’으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고객 4명을 만났다. 회사 담당자가 일러준 약속장소에 나가면 고객들은 늘 전화통화 중이었다. “파인대부의 OOO입니다” 하고 인사하면 그들은 통화 중인 전화기를 건넸다. 수화기 속 직원은 “OOO 씨 맞죠? 회수금은 계좌로 입금해주시고요, 다시 고객님 바꿔주세요”라고 했다. 그러고선 돈봉투를 건네받고 은행 ATM에서 무통장 입금을 했다. 모두 4200만원이었다.

경찰에 가서야 그게 ‘보이스피싱’임을 알았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는 ‘대면 편취’라는 방식이었다. 일자리를 제안한 ‘김 형’이란 자는 조직원이었다. 처음 수사를 담당한 경찰서의 형사는 “왜 서울까지 와서 사고를 치느냐. (보이스피싱인지) 모를 수가 없다”며 윽박질렀다. “(몸통은) 잡을 인력도 잡을 능력도 없다”는 말까지 듣자 멘털이 무너졌다.

최씨는 수원에서의 소동 이후 어머니 손에 이끌려 2주간 폐쇄 병동에 입원했다. 그는 이 시기를 다시 떠올리길 힘들어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였고 수차례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의 변호를 맡은 이원일 변호사는 병원에서 의뢰인을 면접했을 때를 회상했다. 이 변호사는 “(정신병원에 있다고 하니) 편견을 가지고 만났는데 실제론 공손하고 예의 있더라. 이렇게 될 사람이 아닌데, (보이스피싱에) 연루되니 스트레스가 그만큼 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최씨를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그를 보이스피싱 ‘공동 정범’으로 판단했다. 4건의 범행은 따로 수사가 이뤄졌고 재판도 1건은 서울에서, 나머지 3건은 울산에서 따로 진행됐다. 이 변호사는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을 폈다.

과거와 단절하기

보이스피싱 ‘무죄’ 받았지만…신경안정제는 못 끊는 이유 [인간 대포통장]
지난 4월 선고된 최씨의 1심 판결문. 현금수거책으로 가담했단 이유로 함께 기소된 다른 피고인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같은 피해자를 만나서 돈을 받았고 경찰에 붙잡혔다.

“피고인 최윤서는 무죄.”

지난 4월 중순 서울 동부지법에서 1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판사가 주문을 읽자 최씨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법원 복도에서 한 시간을 울었다. “‘무죄’는 생각도 안 했어요. 심리적으로 잔뜩 웅크린 채로 갔기 때문에 감정이 더 복받쳤습니다.”

판사는 판결문에 “제출된 증거만으론 보이스피싱 사기 범행에 고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적었다.

‘김 형’이라는 사람이 요구한 취업서류(신분증 사본, 가족관계증명서 등)를 모두 건넨 점, 주변에 “취직했다”며 자랑하는 메신저 내용 등에 주목했다. 합의금을 마련해 건넨 것도 참작됐다.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은 “누가 봐도 평범한 직장인 같았다. 피고(최씨)가 취업 사기를 당해 돈을 받아갔다는 걸 믿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무죄가 한 번 나왔다고 끝은 아니다. 모든 사법 절차를 언제 마칠지 모른다. 울산지법에서 진행되는 다른 재판에선 지난달 최씨에게 징역 10월이 선고됐다. 무죄가 나온 동부지법 재판은 2심(항소심)으로 넘겨졌다. 항소심 재판부의 선고는 다음달로 예정됐다. 무죄가 뒤집힐 수도 있다.

대학 시절 학회장을 맡을 정도로 활발하던 최씨는 사건이 터지고 꼬박 1년을 은둔자로 살고 있다. ‘그 일’에 대해서는 가족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20년지기 친구와의 관계도 끊었다. 하루 두 번 약봉지와 씨름을 한다.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 수면제 따위를 12알 삼킨다. 그는 “딱히 약 부작용은 없는데 끊으면 불안 증상이 심해지고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정서 상태는 최악에선 벗어났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갉아먹지 않도록 애쓴다.

“처음 입건됐을 땐 ‘평범한 제약회사 직장인이란 소박한 꿈, 미래가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휩싸여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이미 저질러진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일을 했던) 그 시간대를 조각내서 통째로 드러내는 거예요. 제 시간을 버리지 말아야죠.”

[헤럴드경제 디지털스토리텔링 : 인간 대포통장] 졸지에 사기범죄의 ‘공범’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만나 수백~수천만원의 현금다발을 받아 어딘가로 입금했습니다. 수사기관은 그들을 ‘현금수거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 총책과 범행을 공모했다는 죄를 묻고 있습니다. 헤럴드경제는 102명의 보이스피싱 공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15명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들이 범죄자로 연루되기까지의 배경, 어떻게 일했고 붙잡혔는지를 파악했습니다. 대부분은 가짜 취업 공고에 속아 ‘그 일’에 엮였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취업준비기간을 보내던 청년, 코로나19로 일터에서 밀려난 구직자, 단지 세상경험 쌓으려 알바를 찾았던 대학생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피해자와 사회는 그들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범죄인 걸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설계자들이 짜놓은 판은 지독하리만큼 교묘합니다. 피해자들을 감쪽같이 속이듯이 자기들의 수족 노릇을 할 사람도 철저히 기망합니다. 정작 보이스피싱 본체는 막대한 수익만 삼키고 법망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공범이 된 이들의 허물없음을 대변하려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는 한순간에 피해자-피의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기록입니다. 동시에 보이스피싱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을 비난하고 강하게 처벌하는 게 최선인지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 헤럴드경제의 ‘인간 대포통장’ 기획은 3부에 걸쳐 보도됩니다. [프롤로그] [단독] 보이스피싱 ‘공범’ 몰렸다 실종된 아들,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1부] ① ‘살아있는 대포통장’ 된 그들…절반 이상이 2030 ② 보이스피싱 ‘꼭두각시’로 쓰이다 버려진 사람들 ③ “엄마, 그냥 교도소 갈게”…22살 아들이 보이스피싱 ‘낙인’ 찍혔다 ④ 5060도 ‘보피 알바’…감쪽같은 사업자등록증에 속는다

헤럴드 디지털콘텐츠국 기획취재팀 기획·취재=박준규·박로명 기자 일러스트·그래픽=권해원 디자이너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