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도 밭갈고 농민도 글읽고..이상향 지향

가문 내 학문-경제에서 출발, 마을로 확대

장흥위씨, 실천하는 실학자 위백규 등 배출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밭 갈고, 글 읽어라.”

얼핏 평범한 가훈 같지만, 반상의 구분이 뚜렷했던 조선시대엔 밭 가는 자, 글 읽을 필요가 없고, 글 읽는 자, 밭 갈 이유가 없었기에, 매우 파격적인 주문이다.

장흥위씨 후손들이 지역주민들과 상생하는 장흥 관산읍 방촌리는 양반도 과학영농, 경세제민을 위해 허드렛일을 하는, 수백년 공동체 정신으로 유명하다. 반계공 위정명의 유훈에 따라 양반도 주경야독했고, 존재 위백규(웅천공파) 같은 실천형 실학자를 배출했다.

어수선한 요즘, 상생 공동체 문화가 어느때 보다 강조되는 상황에서, 반상의 구분이 뚜렷한 조선시대 리더들이 자세를 낮추고 백성들과 상생하는 모습은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전남 장흥의 명산 천관산 동편마을 관산읍 방촌리엔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 94기(전라남도 기념물 제134호, 장흥 방촌리 지석묘군)가 발견됐고, 외침으로부터 마을을 방비하기 위해 천관산 중턱부터 석성과 토성으로 둘러친 회주고성의 성터가 남아있다. 신라조, 고려조에는 장흥(옛 이름 회주)을 통치하는 행정 치소가 있었던 곳이다.

장흥위씨 반계종가 입구의 장승은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든 석장승이다. [남도일보 서정현 선임기자]
장흥위씨 반계종가 입구의 장승은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든 석장승이다. [남도일보 서정현 선임기자]

조선 중기 이 가문은 반계공파, 웅천공파, 관산파, 안항공파 등으로 나뉘었는데, 상당수 후손들이 방촌마을을 지키고 산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을 것,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라”는 상생의 독트린은 반계공 위정명(1589~1640)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후손에게 남긴 교훈이다.

이 가문의 안항공파 위덕후(1556~1615)는 “농사에 힘쓸 것, 제사를 잘 받들 것,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낼 것, 자손을 잘 가르칠 것, 노복을 어루만져 감싸줄 것, 관리를 공경할 것” 등 여섯 유훈을 남겼다.

장흥위씨 반계종가 사랑채. 역대 종손들의 당호 현판 8개가 걸려 있다. [남도일보]
장흥위씨 반계종가 사랑채. 역대 종손들의 당호 현판 8개가 걸려 있다. [남도일보]

관산 방촌의 장흥위씨 후손들은 이 같은 선조의 유지에 따라 장천재 등에서 교육에 힘써 존재 위백규(1727~1798) 같은 대학자를 탄생시켰다. 그는 말 만 하는 학자가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실학자였다.

장흥위씨는 주경야독 공동체 사강회와 향촌규약을 만들었다. 계원 즉 친족이 아닌 사람도 사강회에 들였다.

1월과 8월을 제외하고 매월 1일과 보름에 강회를 연다. 30세 이하는 각기 정해진 책을 가지고 평상시의 의식대로 나아가 내용을 외운다. 아이들은 소학과 격몽요결 등을 외우고, 8세 이하는 육갑(六甲)을 외운다. 이후 의심나거나 모르는 곳에 대해 선례들에게 질문한다. 마치고 나면 술을 한 잔 올린다. 마시는 것은 세 잔까지 만 허락한다.

장흥위씨 반계종가 오헌고택 출입구 [문화재청]
장흥위씨 반계종가 오헌고택 출입구 [문화재청]

농규(農規)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밭을 갈 힘이 있는 자는 스스로 밭을 갈고, 감당할 수 없는 자도 거름을 주고 북을 돋는 일을 도와준다.

여름에는 매번 아침을 먹고 나서 각자 도롱이에 삿갓, 호미와 낫, 그리고 읽어야 할 책과 붓통을 갖추어 일직(日直)의 밭에 모인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가 되면 밭 갈기를 중지하고 시원한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데, 어떤 이는 책을 읽고, 어떤 이는 글씨 연습을 하며 어떤 이는 신발을 짜되, 게으르게 낮잠을 자서는 안 된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강당(講堂)에 모인다. 매번 겨울이 되면 돛 자리 짜는 일을 겸한다. 자제 가운데 과거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에는 규정에 예외로 한다.

방촌유물전시관
방촌유물전시관

향촌에서 나온 시문을 보면, 양반이 허드렛일을 해보지 않고는 나올수 없는, 상민이 글공부를 하지 않고는 나올수 없는 자연주의 리얼리즘, 체감도 높은 글들이 많다.

존재 선생은 1767년 41대 사강회 대표로 공동체를 이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로선 매우 혁명적인 경제인문공동체였다. 사학자들은 최근 사강회가 지향했던 것은 ‘이상향’이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오헌유고 등 12세 유고는 400년 생활사가 정밀하게 기록돼 있다.
오헌유고 등 12세 유고는 400년 생활사가 정밀하게 기록돼 있다.

반계종가는 20세기까지 300~400년간 가장이 살아온 일대기를 적었다. ‘위씨세고-12세유고’는 경제,사회,문화,정치,안보 등이 세세하게 기록된 엄청난 사료이다.

종택 보존도 잘해 반계공파의 오헌고택, 웅천공파의 존재고택 모두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장흥위씨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파견돼 귀화한 8학사 중 아찬·상서시중을 지내고 회주군에 봉해진 위경을 시조로, 고려조에서 대각간시중을 지낸 위창주를 중시조로 삼는다. 중시조 5세손 위계정(1038~1107)은 청렴하고 문장이 뛰어난 문신으로 고려사에 기록되고 벼슬은 문하시중에 올랐다. 조선 중기 15세손 위덕룡의 네 아들에 의해 분파가 이뤄졌다.

[취재도움: 전남종가회, 남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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