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통해 인류 문화사 조명
플라톤, “지식인이라면 수영”
그리스·로마 전투기술로 각광
로마는 물로 통해..수로 건축 경이
중세 천년,마녀와 결합 암흑기
르네상스 재발견, 근대 경주로
미중 '핑퐁외교'애초엔 수영이
수영기술 과학화,수영은 진화중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1933년 10월 헝가리 태생의 탐험가 라즐로 알마시는 이집트 남서부 길프 케비르 고원에 위치한 와다수라의 암벽을 오르다 이전에 보지 못한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벽에는 여유롭게 헤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사막의 골짜기에 한 때는 수영이 가능할 만큼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70년 후, 다시 와다수라에서 중요한 벽화지구가 발견된다. 바위벽에는 동물과 인간이 묘사된 1만5천 점의 벽화가 나왔는데, 헤엄치는 사람들의 모습도 다수 발견됐다.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계절풍이 오르내리면서 사하라사막에도 하천과 호수가 형성됐던 시기가 있었다. 와다수라 벽화가 그려진 8천년 전 경에도 계절풍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물이 넘쳐났다.
‘헤엄치는 인류’(미래의창)는 이집트 사막에서 시작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꽃을 피우다 중세의 암흑기로 접어든 뒤 르네상스와 함께 기지개를 펴 올림픽으로 전성기를 맞은 수영의 역사, 인간과 물의 문화사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고대는 수영의 황금기였다. 플라톤이 “인간은 읽고 쓰고 헤엄칠 줄 알아야 비로소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스에서 수영은 필수 과목이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수영의 효용은 무엇보다 군사 기술이었다. 이는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협에서 벌어진 그리스 함대와 페르시아 함대의 충돌사건에서 확인된다. 역시가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군사도 타격을 입었지만, 그 피해는 아주 적었다. 그들은 수영에 능했기 때문에 군함이 파괴되었더라도 칼에 맞지만 않았다면 살라미스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이방인들은 이 기술을 무시한 탓에 익사하고 말았다”고 썼다. 이런 일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중에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인들은 수영에 능했고, 적들은 그러지 못했을까. 수영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그리스인들은 이 즈음 알몸으로 스포츠를 즐기기 시작했으나. 적들은 여전히 드러내는 걸 꺼리는 문화였다.
로마의 마지막 수영영웅은 줄리어스 시저였다. 기원전 47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의 공격에 힘을 쓰지 못한 시저는 바다에 뛰어들어 해군과 선박 사이를 오가며 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인들에게 수영은 시민의 덕목 이상이었고, 건축양식도 수영하기에 알맞게 바뀌었다. 수로와 분수, 목욕탕, 수영장은 도시의 핵심을 이뤘다.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생매장된 도시 폼페이는 로마의 수영, 물문화와 건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로마는 점령지인 영국 브리튼 베스에 그들의 자랑스런 묙욕탕 건축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중세가 시작되면서 천년의 시간동안 수영은 잊혀졌다. 중세 시대에 물은 마녀와 결합, 죄악시됐다. 마녀로 지목된 이들은 마녀 물고문을 당했는데, 호수에 던져 떠오르면 죄가 있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인류는 이 암흑기간 팔과 다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물 속에서 나아갈 수 있는지조차 잊어버렸고, 베어울프 등 전설적 영웅들의 이야기만 떠돌게 된다.
수영이 동면 상태에서 부활하는 데 구대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러셀, 바이런 경이다. 프랭클린은 수영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며, 정규 교육기관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직접 손과 발에 다는 노를 만들어 실험했는데, 오늘날 수영 훈련도구의 원조격이라 할 만하다.
19세기 들어 수영은 흥미로운 내기 경주로 부상한다. 1927년 미국에선 102명이 샌피드로 해협을 횡단하는 경주에 무려 2만5000달러의 상금액이 걸렸다. 이즈음 여성들의 도버해협 도전이 이어졌지만, 일반 여성들에게 수영은 아직 먼나라 얘기였다. 옷을 입은 채 마차를 타고 해변가까지 간 뒤, 도우미에 힘입어 머리를 담그는 게 고작이었다.
원피스 수영복의 원조는 1907년 보스턴 리비어 해변에서 캘러만이 디자인한 옷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녀는 다리가 훤히 드라나고 가슴의 형태가 드러난 옷을 입고 나타났다가 부적절한 노출로 재판에 섰다. 비키니는 1946년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에 의해 선보였다.
흥미로운 외교비사도 있다. 1973년 미 헨리 키신저와 중국의 주언라이 수상이 파리에서 만나 양국수교에 사인한 ‘핑퐁외교’의 주인공은 사실 탁구가 아니라 수영이었다. 마오 주석은 수영을 즐기는 수영인이었고, 마오는 탁구가 아니라 수영과 다이빙을 교류하고자 했다. 미 국무부는 이에 적극적이었지만 국제수영연맹의 입장은 달랐다. 국제수영연맹은 여전히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대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두 나라의 공식 경기를 금지했다.
근대올림픽 개최 이후 수영경기는 계속 진화해왔다.일본은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수영 대표팀을 참가시켰는데, 사무라이 영법 외에 다른 세계의 수영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이후 서구 수영을 금세 배워 4년 후 평영경기에서 철도원인 요시유키 쓰루타가 200미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10년은 일본이 수영을 제패했다. 1932년 LA올림픽에서 일본은 11개 경기에서 무려 금메달 5개, 은메달 5개, 동메달 2개를,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선 금메달 4개 등 총 11개의 메달을 따면서 수영종목의 메달 절반 이상을 수확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1940년 도쿄올림픽은 절정의 순간이 될 수 있었으나 국제정세가 불안해지면서 올림픽일정은 취소됐고, 세계대전으로 일본의 올림픽 개최는 24년 뒤로 미뤄졌다.
책은 수영 속도전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펠프스가 수영황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신체적 요인 등 역사에서 과학으로 나아가는 수영이야기가 이어진다. 수영선수로, 코치로 활약하기도 한 저자의 커리어가 빛나는 책이다.
헤엄치는 인류/하워드 민즈 지음, 이윤정 옮김/미래의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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