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빈 번역가의 한국어 대본 이야기

세계최초 라이선스 무대 강렬한 신고식

기발했지만 가차없이 버려진 것 ‘수두룩’

시대성 담아낸 풍자·감칠맛 나는 ‘말 맛’

언어의 번역 넘어 문화까지 번역 시도

대본, 유기적 생명체...배우들에 옵션 부여

‘비틀쥬스’의 한국어 대본을 맡은 김수빈 번역가는 이 작품에 대해 “경계를 넘나드는 대사가 많아 좀 더 ‘기분 좋은 매운맛’을 찾고, 웃음 속에서도 풍자와 해학을 담는 번역을 해야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오른쪽 사진들은 시대성을 담아낸 통쾌한 풍자, 감칠맛 나는 말맛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뮤지컬 ‘비틀쥬스’속 장면들. [CJ ENM 제공]
‘비틀쥬스’의 한국어 대본을 맡은 김수빈 번역가는 이 작품에 대해 “경계를 넘나드는 대사가 많아 좀 더 ‘기분 좋은 매운맛’을 찾고, 웃음 속에서도 풍자와 해학을 담는 번역을 해야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말했다. 오른쪽 사진들은 시대성을 담아낸 통쾌한 풍자, 감칠맛 나는 말맛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뮤지컬 ‘비틀쥬스’속 장면들. [CJ ENM 제공]

두서없이 뒤섞인 ‘언어의 조각들’은 절묘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시험관 안에 우리말을 부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어떨 땐 굉장히 쉽게 이뤄지기도 하지만, 어떨 땐 끝까지 모를 때가 있어요.” 말은 꼬리를 물어 새로운 말을 발견했다. 잘 버무려진 말들이 배우의 입을 거치자, 명대사도 쏟아졌다. ‘비틀쥬스’가 아니었다면, 이 대사를 말할 수 있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이승과 저승 사이의 ‘낀 존재’로 98억년을 외로이 살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VIP석과 R석 사이에 낀 시야방해석 같아.” 절묘한 한 줄에 객석에선 무릎을 ‘탁’ 치고, 웃음을 ‘팍’ 터뜨린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고 한다. ‘비틀쥬스’의 한국어 대본을 맡은 김수빈 번역가는 “공연을 시작만 했을 뿐 마지막까지 대본을 쥐고 있었다”며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기발했지만, 가차없이 버려진 것도 숱했다. 상황과 목적, 의도와 웃음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한 줄’을 찾아 헤맸다. “아이디어는 많았는데 80% 이상 버렸어요.” 시야방해석 이전엔 “전세와 월세 사이에 낀 반전세”가 유령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개막 당일에 바뀐 대사였어요.” 극장의 유령석에서 영감을 받아 ‘비틀쥬스’ 역을 맡았던 정성화가 아이디어를 냈다.

1988년 제작된 팀 버튼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비틀쥬스’는 201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뒤, 이번 여름 한국에서 전 세계 최초 라이선스 무대를 마쳤다. ‘비틀쥬스’가 관객과 만난 시간은 약 한 달. 짧았지만, 강렬하고 강력했다. 시대성을 담아낸 통쾌한 풍자, 감칠맛 나는 말맛은 이 작품이 인기를 끌었던 일등 요인이다. 최근 화상으로 만난 김수빈 번역가는 “유난히 머릿속에 남는 작품이 있다”며 “ ‘비틀쥬스’는 작품 속에서도 작품 자체로도 아주 짓궂고 괴랄한 악동이었다”고 말했다.

‘비틀쥬스’엔 개막 전부터 우려 아닌 우려가 따라왔다. ‘미국식 블랙코미디’의 한국화 과정이 ‘작품의 성패’로 거론됐다. 시대성을 반영한 풍자와 해학, 치고받는 대사에서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유머를 현지화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비틀쥬스’의 번역이 쉽지 않았던 것은 작품이 고수해야 하는 양식과 구조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원작과 해외 연출진이 요구하는 ‘조건’이 많았다. 스탠드업 코미디 구조와 그 안에서 현 세태를 반영한 풍자 ‘한 줄’이 ‘한 방’으로 자리해야 했다. 웃기지만 우습지 않아야 했고, 불편하지 않은 유머와 풍자가 핵심이었다. 김수빈 번역가는 “경계를 넘나드는 대사가 많아 좀 더 ‘기분 좋은 매운맛’을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단순히 웃기면 되는 것이 아니라 원작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아야 하고, ‘비틀쥬스’의 세계관 안에서 공감할 수 있어야 했어요. 그 안에서 풍자가 나와야 하고요. 놀랍고 통쾌하되 불쾌하지 않은 선을 찾아야 했고, 지나친 정치색이나 노골적 표현에선 수위 조절이 필요했어요. 모든 것이 교집합을 찾는 과정이었어요.”

비틀쥬스라는 캐릭터도 독특하다. ‘유령’의 특수성을 입어 괴랄하고, 어디로 튈지 모른다. 늘상 요란한 행동을 하고, 선을 넘나드는 “산통 깨는 캐릭터”로의 자유분방함을 보여준다.

“비틀쥬스는 극을 이어가다가 흐름과 관계없이 딴 소리를 해요. 원라이너(One-liner:이른바 한 줄치기, 한 줄짜리 농담)와 스탠드업 코미디의 구조를 가진 대사들이 등장하죠. 작품의 세계관 안쪽에서 움직이며 이야기를 진행하다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하면서 극에서 빠져나가 단 한 줄로 현실 풍자를 하는 거죠. 예측할 수 없는 대화법이에요. 자기중심적인 캐릭터가 주는 무방비함에서 풍자가 확 들어오는데, 우리나라 관객들의 정서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이 많았어요.”

풍자의 핵심은 보편성과 한국화였다. 모두가 공감하는 현재의 이야기가 적확하게 날아들었다. 전 세계에 휩싸인 코인 광풍을 대사로 녹였다. 가장 혐오하는 것은 ‘유튜브 알고리즘’,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코로나 검사’ 등 2021년의 오늘이 대본에 반영했다.

캐릭터와 상황의 한국화는 국내 관객들의 몰입을 높이는 장치였다. 단순히 문장을 옮기는 것을 넘어 재창작에 가까웠고, ‘언어 번역’을 넘어 ‘문화 번역’으로 승화했다. “문화적 레퍼런스를 한국화하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현지화를 할 땐 미묘하지만 하나씩 심어주면 좋을 메타포를 찾으려 했고요.” 갑작스럽게 삶을 마감한 아담과 바바라 부부가 비틀쥬스를 ‘선배’라고 부르거나, 한국에선 낯선 직업인 ‘라이프 코치’(델리아 역)를 인테리어 디자이너 겸 인생 멘토로 치환한 것이 대표적이다.

대본은 끊임없이 수정을 거쳤다. 배우들의 말하는 습관, 발음상의 장단점, 노래할 때의 음역대 등을 고려해 수정을 거듭했다. “연습과정에서 더 좋은 게 나오면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아요. 보는 사람이 재밌다 느끼면 빨리 갈아타야 하죠. (웃음) 아무리 제가 최선을 다해도 집단지성을 이길 수는 없어요.” 그 과정에서 그는 탄탄한 골격을 세우고, 무너지지 않는 기반을 다졌다. 배우들이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도록 여러 옵션을 만들어 펼쳐 놓았다. “아이디어가 덧입혀지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것이 나온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세계관 안에서 저 혼자 완성하는 작업이 아니에요. 막상 제가 할 때보다 배우에게 입혀졌을 때, 그 말들이 확 살아나는 신기한 순간들을 만나게 돼요. 제가 가진 생각과 혼이 언어의 형태로 표현돼 배우들이 만들어가는 거죠. 이 모든 요소가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구현된다는 신비로운 작업이에요. 대본은 그렇게 진화하는 유기적인 생물체예요. 그게 번역의 묘미인 것 같아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