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 주인공
2017년 이시다 역 시작으로 단골 출연
“아빠된 후 만난 안중근, 감정 달라져”
창의적 무용수…동작 함께 더하며 무대 완성
역동적 군무신ㆍ마지막 파드되는 명장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는 ‘한 줄의 유언’에서 시작됐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0년 2월의 뤼순(旅順)감옥,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안중근의 마지막 모습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고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온몸으로 맞섰던 그의 생을 되짚어가는 동안 마음속엔 많은 감정들이 충돌했다.
“안중근 의사 역할은 처음이 아닌데도 이번엔 특히나 감정과 생각의 깊이가 달라지더라고요.”
윤전일은 예술의전당이 광복 76주년을 맞아 선보이는 창작발레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13~15일, 예술의전당)을 통해 관객과 만난다. 작품과의 인연이 깊다. 그는 2017년 일본 장교 이시다 역을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안중근 역을 맡아 매 시즌 무대에 서고 있다. 단연코 역대 ‘최다 출연자’다.
올해 무대는 유달리 특별하다고 한다. 환경의 변화로 작품과 역할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졌다. 윤전일은 “처하고 있는 현실과 상황에 따라 감정의 변화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배우 김보미와 결혼한 후 아들을 품에 안았다. 공연 연습에 매진하면서도 일주일에 네 번은 ‘발레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엔 육아에 전념한다. 결혼 전엔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지만, 결혼 후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을 꿈 꿀 만큼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 마음이 작품을 만날 때마다 고스란히 녹아든다. “육아 담당을 하는 주말엔 아기의 생활 패턴에 모든 걸 맞추고 있어요. 아기 깨워 밥 먹이고, 놀아주고, 재우고…. 이제 8개월이라 고되긴 하더라고요. (웃음) 가족이 생긴 후 안중근 의사를 표현하려다 보니, 작품 안에서 감정의 몰입이 더 높아졌어요.”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은 M발레단이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무용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돼 초연됐다. 해마다 무대에 올랐지만, 올해만큼 대대적으로 달라지진 않았다. 윤전일은 “이전 시즌들은 축소판이었다면, 이번엔 스케일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드라마는 촘촘히 채워졌고, 무대 세트와 음악도 각 신에 맞춰 달라진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 해외 발레단에서 활약한 전·현직 발레 스타들이 총출동하는 더블 캐스트팅으로 대규모 ‘드라마 발레’의 진수를 보여준다.
가장 큰 변화는 ‘영웅’ 안중근의 삶과 내면의 감정이 충실하게 표현된 점이다. “이전에는 작품에서 무용수에게 모든 감정을 맡겼다면, 이번엔 확실한 맥락과 드라마가 만들어져 (무용수들이) 분명하게 표현해야 하는 인물들의 감정이 생겨났어요.” 윤전일이 만드는 안중근은 조국의 광복을 위한 뜨거운 외침에 주저함이 없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안중근이라는 위인의 삶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에요. 그런 만큼 어렵더라고요. 안중근은 자신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어떠한 길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히 제 길을 가는 의인이에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인데, 전 슬픔의 감정이 크게 오더라고요.” 한 아이의 아빠이자 가장이 된 자신을 떠올리니, 두려움도 커졌다고 한다. “만약 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묻게 됐어요. 가족을 생각하면 스스로를 헌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작진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물었다. ‘혹여라도 두려움은 없었을까’, ‘가족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가능했을까’. 촘촘하게 엮은 드라마는 그를 설득했다. “나의 희생으로 많은 것들이 제 자리를 찾고,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강인함과 당당함을 표현하려고 하고 있어요.”
사유를 거듭해 얻은 감정선은 잘 짜여진 안무로 완성된다. 루마니아국립오페라발레단 출신으로 다양한 무대에서 존재감을 보여온 창작자이기도 한 윤전일은 ‘창의적인 무용수’다. 주어진 안무 안에서 다양한 동작을 제안하고, 안무가인 문병남 M발레단 단장이 판단해 수용한다. “하나의 동작을 받으면, 그 사이에 추가할 수 있는 옵션을 서너 개를 만들어 보여드리려고 해요. 안무는 안무자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용수도 자신의 길을 찾아야 수월하게 동작을 표현할 수 있어요. 전체 안무를 선생님께서 주시면 그 안에서 제 몸이 편한 동작들을 제안해요. (문병남) 선생님께서도 워낙 열려 계셔서 잘 받아주시고요.”
윤전일이 이번 무대에서 꼽는 최고의 장면은 군무신과 에필로그의 파드되다. “일본 경찰들과의 군무신은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강인함이 보여지는 명장면”이라고 한다. 에필로그에서 뤼순감옥에 투옥된 안중근이 아내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은 “숨도 못 쉴 만큼 힘든 장면”이었다. 첫 연습 때는 마지막 솔로를 마친 뒤 주저앉았다. 동작의 난이도가 높은 데다, 모든 감정을 응축해 터뜨려야 하는 힘든 신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떠나는 사람의 감정이 듀엣으로 보여지고, 그 뒤에 솔로로 이어져요. 사실 이 작품에서 안중근이 쉬는 시간은 딱 9분이에요. 모든 감정과 에너지를 이어와 토해내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에요. 듀엣에서 솔로, 죽음을 맞는 순간으로 연결돼 안중근의 아픔과 상처를 모든 춤의 호흡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이 장면을 통해 그의 마음을 우리가 더 깊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