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연구개발(R&D)사업이 양적·질적으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정부 R&D예산은 2년 연속 두 자릿수 증가하면서 총 예산의 4.91% 수준인 27.4조원 규모에 달하는 등 ‘30조원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자족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날로 심화되고 있는 기술패권경쟁은 물론 코로나19를 위시한 감염병 대응, 소부장 기술 자립, 디지털 전환, 탄소중립 등 당면과제가 즐비하다. 기존 국가R&D사업의 역할이었던 산업경쟁력 제고에 더해 국민 삶의 질, 안보,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과학기술의 역할이 필요하다. 미래의 씨앗인 과학기술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성과 창출을 위한 추진 전략의 대변화를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선진국을 모방하는 빠른 추격자 전략에서 탈피해 이제 우리의 국격에 맞는 과감한 혁신과 도전을 도모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필요에 따라 국가R&D의 혁신도전성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말 과학기술기본법을 개정해 혁신도전성이 높은 국가R&D사업의 추진 근거를 마련한 데 이어 과학난제 도전 사업, 알키미스트사업 등 부처별로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사업에서 과제 선정 단계부터 연구목표와 추진방법 측면에서 혁신도전성이 높은 과제에 가점을 부여하는 등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연구를 장려하고 있다. 무(無)에서 출발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그동안 R&D를 통해 충분한 가능성이 입증됐지만 다음 단계로 진행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아 방치돼 있던 성과에서 출발하는 것도 방법이다. 예전에는 엄두도 낼 수 없었지만 정부와 민간을 합한 국가 총 R&D 비용이 100조원에 달한 지금은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모든 부처가 대형 혁신도전형 R&D에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것이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혁신도전형 과제들은 그 자체만으로 여전히 위험 부담이 크고,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된다. 자칫 이런 사업들로 인해 부처의 고유 R&D 영역이 뒷전으로 밀려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관련 부처와 민관이 함께 참여하는 ‘범부처 민관 혁신도전 공동추진 체계’ 구축이 필요한 이유다.

먼저 범부처 공동으로 대상 과제를 발굴한다. 각 부처에서 추진한 R&D 성과 중에서 기술성숙도가 낮고 위험 부담이 크지만 계속 지원할 경우 세계적인 성과 창출이 기대되는 과제를 발굴해 이를 가장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부처, 연구기관, 연구책임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 R&D예산의 일정률을 과학기술혁신본부에 배정해둔 후 대상 과제가 선정되고 주관 부처, 연구기관, 연구책임자가 정해지면 전달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렇게 지원되는 혁신도전형 과제에 대해서는 PM의 선정과 권한, 연구비 지원 방식, 무빙 타깃 등의 추진 전략, 성실실패 인정 등 기존의 국가R&D사업과 차별화된 규정을 마련해 지원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대형 혁신도전형 R&D사업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됐다.

우선 국가R&D예산의 1% 정도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오랜 시간,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해 보여주기식보다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데 집중하고, 외부 요인에 휘둘리지 않는 확고한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김상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