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황주변씨 망암종가, 문리양도의 전형

변윤중 가족 3명, 정유재란때 목숨바쳐 충절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학문이 장성만 못하다)’이라 했다. 장성의 학문은 실천과 연결됐고, 관념이라는 지적이 나올만한 예문 외에 이공계 자연과학을 포괄하는 것이었기에 뚜렷한 강점을 보인다. ‘인문,부국,강병의 실질적 힘으로서의 학문’이 장성에서 일어난 것이다.

장성 황주변씨 삼파 망암종가 시징당에 복원 임란 당시 신기전
장성 황주변씨 삼파 망암종가 시징당에 복원 임란 당시 신기전
변이중 일가가 발명한 화차. 3면의 적에 40여발을 동시발사할 수 있다.
변이중 일가가 발명한 화차. 3면의 적에 40여발을 동시발사할 수 있다.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물리,화학 등 자연과학을 겸비해 나라를 구한 사람들은 장성 황주변씨 망암종가의 변이중(1546~1611)이다. 또 변이중의 집안사람들은 목숨 바쳐 충절을 지킴으로써 성현들의 명저에 나온 노블레스 오블리쥬와 사랑을 지켰다.

남도일보와 전남종가회에 따르면, 변이중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성리학과 경학에 밝아 문과 급제 했으며 이조좌랑, 황해·평안도 도사, 소모사, 조도사, 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망암종가를 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사가 되어 군비를 수습했으며, 조도사로서 전라도에서 병력·군량·무기 등을 찾아 조달하는 중책을 맡았다. 전라도 일대에서 군비를 수습하던 변이중의 사촌동생 변윤중은 집안의 양곡과 마초, 재물을 모아 기부했다고 한다.

망암종가 사람들이 개발한 일총통. 900m 밖 선박 또는 성문을 격파하는, 요즘으로 치면 박격포이다.
망암종가 사람들이 개발한 일총통. 900m 밖 선박 또는 성문을 격파하는, 요즘으로 치면 박격포이다.
변이중의 망암집에 나온 화차도 기록으로 복원된 모형. 조총을 방어하고 40개 총통을 동시발사한다.
변이중의 망암집에 나온 화차도 기록으로 복원된 모형. 조총을 방어하고 40개 총통을 동시발사한다.

변이중은 지난한 연구개발로 만든 화차 300량을 임란 당시 행주산성을 지키던 순찰사 권율 장군에게 전달해 행주대첩 승리에 기여했다.

후손들은 변이중이 남긴 문집 ‘망암집’에 수록된 총통화전도설, 화차도설 등을 근거로 화차 등 당시 무기 18종을 복원해 장성군 장안리에 ‘시징당’을 세우고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엔 조선 중기의 신기전, 총통 등을 비롯해 변이중이 개발했다고 전해지는 ‘화차’가 재현돼 있다.

변이중의 사촌동생인 변윤중(?~1597)은 정유재란을 맞아 가솔을 포함 200여 의병군을 모아 장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중과부적의 상황에 몰려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그의 부인 함풍성씨 역시 “구차하게 사느니 남편을 따르겠다”며 투신했다. 부모와 함께 의병으로 싸웠던 외아들 변형윤도 순절하려 했지만, 부인 장성서씨가 “부모님은 자신이 하늘까지 모실 것이니 대를 이어 집안을 지켜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부모 보다 하류에서 투신했던 며느리 서씨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나라에서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하고 세 사람을 각각 충신, 열부, 효부로 칭하며 그 정신을 만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삼강정려’를 하사했다.

변이중의 아들 15세 변경윤(1574~1623)은 문과 급제, 교서관저작을 역임하고 ‘자하문집’을 남겼다. 그는 광해군 원년에 당파에 따른 기강 문란, 국가 재정, 민생 파탄 등을 논하고 이를 시정할 것을 상소했다.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비판하며 대의를 주장하다 가산을 적몰당하기도 했다. 그는 봉암서원에 제향됐다.

봉암서원 종불사 전각
봉암서원 종불사 전각

16세 변명익(1610~1660)은 행금산군수를 역임했으며, 병자호란에 임금 수레를 호종했다. 효종의 형으로 왕이 되기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 생전에 사돈을 맺었고, 문집 ‘창암유고’를 남겼다. 봉암서원은 종가조 변이중을 주벽으로 변윤중, 변경윤 등 5인의 충신을 배향했다. 장성 황주변씨 삼파 망암종가는 호국정신과 과학기술로 난세에 나라를 구했고, 망암집 등 인문학적 지혜의 족적도 많이 남긴 대표적 문리양도의 종가이다.

남도일보 보도에 따르면, 황해도 황주를 본관으로 하는 황주변씨의 시조는 고려에 귀화한 변려이다. 8세 변광수는 공민왕 때 공신으로 우도병마사를 지내고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신돈이 꾸민 최영 장군에 대한 중상모략에 연루돼 삼척에 유배됐다. 변광수의 조카인 9세 변정이 중군사정이라는 벼슬을 버리고 장성에 은거해 황주변씨의 장성 입향조가 된다. 변이중은 14세손이다.


abc@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