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처럼 입구부터 출구까지 시장이 딱 정해진 지역으로 한정되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일하기 훨씬 편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품이나 용역이 거래되는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
영창과 삼익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피아노를 판매하므로 해당 기업결합에서는 전국이 하나의 시장이었다. 반면 유료방송사업자들의 기업결합심사에서는 전국을 78개 권역으로 나눠 각 권역을 따로 나뉜 시장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 상거래가 이뤄지는 지역적 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와 관련된 논의를 ‘지리적 시장 획정’이라고 한다. 무학과 대선주조 사이의 기업결합에서도 지리적 시장의 범위가 쟁점이 됐다. 당시(2004년) 서울고등법원은 부산소주 대선(시원)과 경남소주 무학(화이트, 좋은데이)의 시장을 부산 및 경남 지역으로 한정했다.
반면 2005년 공정위는 하이트맥주(하이트소주, 이전 보배소주)와 진로(진로, 참이슬) 사이의 결합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지역을 부산·경남·경북·전남·제주를 제외한 전국으로 본 바 있다. 단 1년 사이에 다른 결론을 내놓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지리적 시장의 범위를 정할 때는 특정 지역에서 상품가격이 오르면 얼마나 많은 소비자가 다른 지역 상품을 구매하는지를 보게 된다. 우리 동네 술집이 안주 가격을 올릴 때 동네사람들이 옆 동네 술집을 이용하게 된다면 술집시장은 적어도 우리 동네로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이트소주(전북)·진로(전국) 기업결합에서는 가격 인상 시 소비자들의 선택이 전북을 넘어서는 것으로 조사됐으나 무학(경남)·대선(부산)의 소비자들은 지역 소주에 대한 충성도가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소주라고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소비자들의 선호도나 소비 방식이 다를 수 있고, 그 결과 시장의 넓이도 달리 판단될 수 있다. 부산·경남 소비자들은 지역 소주에 대한 선호가 커서 관련시장이 해당 지역(부산·경남)에 국한되도록 한 반면, 전북 지역 소비자들의 하이트소주에 대한 선호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지역 내 생산품의 역내점유율과 지역 외 생산품에 대한 역외수입률을 통해 지리적 범위를 살펴보기도 한다. 2004년 기준, 무학(대선)의 경남(부산) 지역 역내점유율은 80.0%(86.0%)였으나 하이트소주의 전북 지역 역내점유율은 42.5%였다. 경남과 부산에서는 소비량 대부분이 역내 생산품이었으나 전북에서는 역내 생산품이 전체 소비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도 하이트맥주-진로 기업결합 건에서 지리적 시장이 전북을 넘어서는 것으로 정해진 이유 중 하나였다.
한편 별로 경쟁관계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두 지역이 하나의 시장으로 함께 획정되는 경우도 있다. 서울 가락동 슈퍼마켓과 양재동 슈퍼마켓은 서로 경쟁할 것 같지 않은데, 가락동 주민들이 양재동까지 장 보러 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락동 끝자락의 주민들과 대치동 끝자락의 주민들은 같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볼 수 있다. 또 어떤 슈퍼마켓들은 대치동 주민들과 도곡동 주민들을 놓고 경쟁하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슈퍼마켓들은 서로 중첩적으로 경쟁하면서 양재동 끝자락까지 연결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경쟁이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신세계·월마트 기업결합에서는 공정위가 수서·강남·양재를 하나의 시장(중첩원의 합집합)으로 묶어 할인점시장을 획정한 바 있다.
통상의 상품시장과 마찬가지로 지리적 시장의 획정에서도 중요한 것은 경쟁이 발생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경쟁이 이뤄지는 범위를 합리적으로 정할수록 조치의 정당성이 높아져, 공정위 법집행에 대한 신뢰도도 제고될 것이다.
고병희 공정거래위원회 시장구조개선정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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