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파주염씨 공민왕 장인집
두루미 떼 날아드는 영산강변 언덕, 나주시 송월동엔 새월마을이 있다. 공민왕이 신하의 그림을 손수 그려 하사했던 초상화 주인공의 후예들, 파주 염씨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고려말 몽골제국 원과 고려를 오가며 벼슬을 지낸 염제신(1304~ 1382)은 자주 외교를 시도한 공민왕 때를 포함해 두 번 공신에 올라 곡성(파주)부원군, 곡성백으로 책봉됐다.
그와 그의 딸(愼妃:신비)이 보인 충성심 때문에 공민왕은 염제신의 사위가 된다. 염제신은 원에선 익정사승, 고려에선 우정승, 문하시중에 까지 올랐다.
공민왕은 충신이자 장인인 염제신에게 초상화를 그려준다. 염제신 초상은 섬세한 필치와 품격을 가진 작품으로 평가받으면서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됐다. 이색의 목은문고에 ‘공민왕이 친히 (염제신의 초상을) 그려 하사했다’고 기록돼 있다.
염제신의 1남 국파 염국보는 익재 이제현의 문생으로 과거급제해 정몽주와 함께 고려말 개혁에 참여했고, 3남 염정수는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해 대사헌에 오르고 훤정집을 남겼다.
2남 염흥방은 안타깝다. 그는 홍건적 평정, 개경 수복,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위화도회군이 있었던 1388년, 권력투쟁에 휘말려 가문이 참화(戊辰被禍:무진피화)를 당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무진피화 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염이(염국보의 손자)는 조선 건국 이후 폐와(문을 닫아 걸고 세상을 피함)한뒤 ‘명예와 지위를 구하지 말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의 차남 염순공(?~?)은 대사헌 김덕용의 딸과 혼인하고 나주에 입향했다. 염순공은 행랑채를 명륜당으로 만들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 집터가 현재 나주향교 위치다. 벼슬은 고사했다. 아들 염재는 세종의 부름을 마다하지 못하고 송화(용인)현감을 역임했다. 염재 청백비가 있다.
염공필(1569~?, 호는 금파)은 이괄의 난(1624년) 때 임회 장군 의병창의에 참여해 호남절의록에 올랐고 금파종가를 열었다.
염영서(?~1781)는 홍대용이 혼천의, 자명종을 나주 금성관에서 제작할 때 실학자 나경적의 제자로서 참여해 조선의 기술혁신에 기여했다.
금강사 건물이 낡아 보존에 어려움을 겪었던 염제신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파주염씨의 시조는 고려개국공신인 염형명이며, 염제신은 14세손이다.
함영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