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블러(Big Blur)’는 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ICT)의 발달로 기존 산업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빅블러가 확산되면서 제조업 기반의 자동차산업은 모빌리티 서비스로 영역이 넓어졌고 대다수 유통업체는 이제 온라인기업인지, 오프라인기업인지 구분이 어려워졌다.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도 탄생했다. 제조업의 서비스화가 대표적인데 이는 제품의 생산, 유통, 판매, 유지보수 과정에서 새로운 서비스 영역을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GE와 IBM이 대표적인 선두주자다. GE는 가전, 항공기 엔진 제조에서 소프트웨어기업으로 변모했고 IBM 역시 컴퓨팅 관련 컨설팅, 소프트웨어 솔루션으로 사업을 전환했다. 현재 두 기업 매출의 절반은 서비스 부문에서 나온다.
과거에는 제품의 기능, 내구성 등 품질이 제조업 경쟁력을 좌우했지만 지금은 단순히 ‘좋은 제품’만으로는 특별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소비자들은 한 번의 구매를 통해 얻는 다양한 경험과 만족을 최우선 가치로 두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대기업을 필두로 제조기업들이 제품에 서비스를 더하는 등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독일, 일본 등 전통 제조강국들은 수출용 상품에 서비스 요소를 투입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세계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한국도 제조업의 서비스화가 큰 화두지만 스마트폰 제조에서 콘텐츠기업으로 변화에 성공한 애플이나 항공기 엔진을 ‘사용 시간당 비용’이라는 일종의 구독 서비스 방식으로 판매하는 롤스로이스처럼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는 혁신적인 서비스 모델은 아직 많이 나오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그래도 최근 국내 제조기업이 서비스업으로 사업을 확장하거나 제품과 서비스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로 수출에 성공하는 사례가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 제조기업들은 유형의 제품뿐만 아니라 생산 수단으로만 인식하던 무형의 기술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제약에선 신약물질 제조기술이, 가구는 제품디자인, 중공업은 조선소 및 유조선의 도면 라이선스, 헬스케어는 사용자 데이터를 활용한 소프트웨어(SW)가 새로운 경쟁력 요소가 됐다.
소비자들의 구매 목적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바뀌면서 기업들도 제품 자체보다는 제품의 기능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최근에는 베이커리, 커피 등 식음료와 패션의류부터 의류건조기, 공기청정기, 전기인덕션 등 생활가전, 그리고 자동차까지 구독경제가 확대되고 있다.
제품과 서비스의 융합은 많은 기업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지만 이를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우선 제품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고객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 수요를 발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제품에 대해 개선, 추가,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서비스가 있는지 고민하고 기획과 설계 단계부터 시장 수요를 적극적으로 반영해 목표로 하는 서비스 영역을 선정해야 한다.
제조업의 모든 가치사슬 과정을 디지털 기술과 연계하는 ‘디지털 전환’도 빼놓을 수 없다. 제조업의 서비스화는 제조업의 디지털화라고 일컬을 만큼 첨단 ICT의 역할이 커졌기 때문이다. 고객과 장기적인 관계를 맺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 전문인력에 대한 투자와 교육도 필수적인 요소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최근 우리 정부가 제조-서비스 융합 모델에 집중 투자할 방침을 발표하면서 제조업 혁신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의 서비스화에 우리의 미래 경쟁력이 달렸다. 한류, K-방역에 이어 ‘스마트제조 코리아’로 우리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맹활약하기를 기대한다.
신승관 한국무역협회 전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