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 이끌던 조선·철강

수출제조업 빠르게 늙어가

반도체·가전은 그나마 선방

대부분 현상유지에 급급

협력·부품사 폐업·도산 내몰려

백화점식 규제 없애야 ‘살길’

1908년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디트로이트에서 ‘모델T’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스타 기업인’으로 자신의 명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변방에 불과했던 디트로이트도 일약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도시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지나며 미국의 자동차산업은 붕괴했다. 디트로이트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미국 최고 범죄율에 가난한 도시의 불명예 상징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결국 파산에 직면했다. 파산 규모만도 180억달러(약 20조원)가 넘었다. 인구의 70%가 줄었고, 거리로 내몰린 중산층 노동자들은 오늘날 미국의 정치 구도를 뒤흔들고 있다. ▶관련기사 3면

디트로이트의 몰락은 태평양 너머 타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인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은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을 직접 선포했다. 문 대통령은 2030년까지 세계 4위의 제조 강국을 달성할 것을 공언했다. 하지만 1년여 지난 오늘 이 비전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거꾸로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첨병이었던 제조업의 현실은 처참하다. 고도 성장을 이끌던 조선, 철강, 자동차, 석유화학 등의 수출제조업은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가격 경쟁력과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앞세운 중국의 맹추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다.

그나마 반도체와 가전 정도가 선방할 뿐이다. 이들 업종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전자 등에 불과하다. 나머지 굴지의 대기업들은 현상유지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정체의 벽을 넘어설 성장의 물꼬를 좀처럼 틔우지 못하고 있다. 미래 성장 가치를 반영하는 시가 총액 순위에서 제조업의 상징 현대차는 18위로 밀렸다. 대신 네이버와 카카오 등 플랫폼 기업들이 대약진했다.

타격은 약한고리부터 덮치고 있다. 대기업에 종속된 협력사들과 부품사들이 폐업과 도산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제조업 전체의 생태계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올 상반기 대형조선사의 협력업체들이 수주절벽에 연쇄 폐업의 직격탄을 맞았다. 한때 세계 1위의 경쟁력을 자랑하던 조선업은 글로벌 수요 감소에 속수무책이다. 북유럽 조선업 몰락의 상징이었던 ‘말뫼의 눈물’은 ‘거제의 눈물’로 바뀌고 있다. 자동차 협력사들도 글로벌 판매량 급감과 잇따른 파업에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철강업체들은 글로벌 공급과잉과 원재료가격 상승에, 석유화학기업들은 마이너스 정제마진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 G2무역전쟁의 여파로 ‘화웨이 제재’라는 변수를 맞게 된 반도체 산업마저 앞날을 안심할 수 없게 됐다.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은 곧 일자리 감소, 나아가 산업 전체 생태계 붕괴로 귀결된다. 고용노동부의 노동시장 동향에서 지난달 제조업 고용보험 가입자 수는 351만2000명이었다. 전년 동기보다 6만3200명이나 줄었다.

전문가들은 산업의 판 자체가 바뀌고 있는 구조적 환경에서 제조업의 새 모델 정립이 시급하다고 조언한다. 기업의 혁신 의지를 꺾는 백화점식 정부 규제도 없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홍기용 인천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제조업은 과거에는 노동생산성을 높여 국제경쟁력을 확보해 성장을 구가해 왔지만, 이제는 신기술 신산업으로 전환을 꾀해야할 시점”이라며 “정부도 기술과 노동, 환경 규제를 풀고 민간 활력 높이기 위한 세제 부담을 덜어주는 등 유연성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현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순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