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지정 청산도 난류성 기후로 사시사철 푸르른 섬 곶들은 하나같이 거북이 닮은 꼴
범바위고개는 트레킹코스로 안성맞춤 영화 ‘서편제’ 찍은 당리고개도 가볼만 폐교는 느린섬 여행학교로 다시 태어나
“뭬~야?”, “그 입 다물라, 다물라.”
숱한 유행어를 낳은 2001년 드라마 ‘여인천하’의 타이틀곡은 ‘청산은 나를 보고’이다.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의 제자이자, 여말선초의 향도자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가 지은 ‘고가요집주(古歌謠集註)’ 내용 중 일부를 현대적 감각에 맞는 시어로 바꾸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탐욕과 권력투쟁이 주제인 ‘여인천하’의 타이틀곡은 그 반대 덕목을 가르친다. 무욕과 여유이다.
도시인들이 전남 완도군 청산도(靑山島)에 가면, 나옹선사의 버림과 느림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서울 여의도의 4배인 33.3㎢에 불과한 청산도엔 매봉산(385m), 대봉산(334m), 보적산(330m) 등 여느 해안가에선 보기 힘든 꽤 높은 산이 사방에 솟아 있다. 난대성 기후로 사시사철 섬이 푸르다. 이런 곳에 옛날에 신선이 살았다고 해서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이라고도 했다.
‘빙그레 웃을 완(莞)’자를 쓰는 완도의 여객터미널에서 뱃길로 50여분이면 청산도 대청항에 다다른다. 청산도행 배를 탑승할 때 벌써 에버그린의 기운을 얻는다. 군내리 여객터미널 바로 앞에는 광나무, 황칠, 후박, 동백 등 천연 상록활엽수림이 가득한 주도(珠島)가 심신을 맑게 한다. 1962년, 일찍이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이 됐다.
청산도로 향하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은 시원스럽다. ‘바다에 뿌려진 1596개 보석’ 답게 창망(滄茫)한 물결 위에, 암석 사이사이로 자연풀장이 조성된 달해도, 해무 사이 배추꽃이 솜털처럼 피어나는 모황도, 갯바위 감성돔 낚시터로 이름난 장도와 지초도가 물끄러미 손님에게 미소를 보내는 사이 청산도 어귀 도청항에 도착한다. 도청항에서 오른쪽 해안로를 따라 1㎞쯤 가면 도착하는 당리고개 코스모스길을 지나 읍리와 청계리를 거쳐 4.3㎞를 더 가면 범바위 전망대(해발 183m)에 이른다. 푸른 산과 푸른 바다, 초록이 동색이다.
청산으로부터 출발해 바다를 연모하며 뻗어나간 청산도의 곶들은 하나같이 거북이를 닮았다. 서쪽 화랑포 끝자락의 곶은 아빠 거북, 범바위 전망대 동쪽 매봉산에서 뻗어 바다를 향하던 곶은 엄마 거북이다. 엄마거북 앞에는 아기거북이라는 애칭을 가진 섬이 육지를 향해 다가간다. 바다를 연모하다 늦겨울에야 붉은 열정을 뿜어내는 청산도 동백꽃과 느림의 미학으로 진한 사랑을 시위하고 있는 거북 가족 심성은 안닮은 듯 닮았다.
범바위 바로 아래 권덕리에서 30~40분 걸리는 트레킹 코스로 오르는 것도 좋다. 가파르기에 거북이처럼 조심조심 기어가야할 범바위고개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전망이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청산도 도청항 뒤편 언덕길에는 ‘느린 걸음, 느림 카페’가 있다. 그 앞에는 ‘파시’ 호황기에 즐비했던 요정과 술집의 흔적이 남아 대조를 이룬다.
청산도가 주는 감정 정화의 요소는 이처럼 다채롭다. 1992년 당리고개 일대에서 ‘서편제’를 찍은 임권택 감독의 감회는 또 다르다. 3년전 이곳을 다시 방문한 그는 “당리 일대 논밭에서 일하는 아낙들을 보면서 그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는데, 꽃길을 거닐며 가슴의 한(恨)을 창으로 풀어내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더없이 좋은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청산도 북서쪽 지리청송해변과 동쪽의 신흥리 해변은 육각 릴레이파도로 유명하다. 평지에 가까운 해변 백사장에 물때가 되면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앞선 파도를 뒤따르는 파도가 밀면서 내는 물결 도형이 때론 삼각형이었다가 때론 육각형으로 변한다. 특히 신흥리는 ‘거북이 등’ 같은 곳이 있어 물이 밀려왔다가 등을 넘어 가지 못하고 잠시 빠져나간 흔적 마저 파도형상으로 남는다.
완만하게 굽은 등을 가진 신흥리 ‘풀등해변’은 청정 고기잡이에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휘리’ 어획법은 ‘풀등스럽다.’ 물이 나갈 때 그물을 단 모터보트가 바닷가로 150m 갔다가 좌회전해 80m를 간 뒤 다시 왼쪽으로 틀어 150m앞 해변으로 돌아오면서 직사각형 넓은 그물을 친뒤 그물 끝줄을 경운기로 당기는 것이다. 미처 밀물을 빠져나가지 못한 덩치큰 물고기가 순식간에 갇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기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소 조수 간만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날랜 물고기가 그물밖을 뛰쳐 나가기 때문이다. 휘리로 물고기를 잡거나 즉석 회를 치는 어부가 의외로 젊다. 뭍이나 도회지에서 기약없는 꿈을 꾸는 것보다 고향에서의 삶이 경제적,정신적으로 풍요롭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여행객들은 이 잘 생긴 젊은이들을 ‘신흥리 아이돌 어부’라고 놀렸다. 평소 20명으로 제한한 휘리 체험은 1인 1만원이고 청산도 숙박객은 절반값에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지금은 2000명을 조금 넘지만 한때 1만2000명을 헤아리던 청산도였다. 그래서 폐교도 속출했는데, 폐교는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느림의 미학을 실현하는 숙식시설 ‘느린섬 여행학교’(www.slowfoodtrip.com)는 휘리 예약까지 해준다.
청산도에는 에디슨이 울고 갈 과학영농 발명품과 서울 사대부집 자제도 놀랄만한 예의범절의 전통도 있다. 크지도 않은 섬에 어촌계가 없는 신풍, 부흥, 양지리를 비롯해 8개 마을에선 논농사를 지었다. 모래흙인 사질토로는 논농사 짓기 힘들어 물이 흩어지지 않게 평평한 돌로 겹겹이 쌓아 물을 가둬놓은 뒤 빈공간을 흙으로 5~6회 다져 만든 인공답 ‘구들장 논’이다. 400년 역사를 가진다. 마을 공동작업으로 10평 만드는데 1년 걸리는 구들장논에서 청산도 원주민의 과학영농 혜안, 공동체 의식,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성실함을 한꺼번에 배운다. 유네스코도 놀란 이 과학영농은 인류 유산으로 지정됐다.
완도 아이들의 자랑질 소재는 두가지다. 하나는 요즘은 귀해진 삼치회를 먹었다는 것과 저승으로 가는 가족을 정성껏 초분(草墳)했다는 것. 망자를 숨진 즉시 조상에게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해서 풀로 만든 초막으로 가묘를 만들어 봉양한 뒤 3~5년 있다가 땅에 묻는 풍습이다. 상주가 없을 때, 땅 파기 힘든 겨울에 돌아가셨을 때 이런 초분을 하지만, 조상을 보내기 싫은 후손의 사랑도 배어있다.
청산도를 떠나 완도의 몸에 해당하는 본섬 ‘체도(體島)’에 들어와도 ‘빙그레 웃을 곳’은 참으로 많다. 1050㏊의 광활한 면적에 3449종의 자생식물이 자라고 있는 완도수목원, 장보고에서 지석영, 최경주까지 완도의 지혜와 용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장보고기념관, 파도와 모래가 부딪칠때 나는 소리를 ‘감동적인 상봉의 울음’이라고 여겨 ‘울 명’자(鳴)자를 쓰는 명사십리, 약산 동백숲해변 등을 자세히 소개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이 중에서 완도읍 정도리의 구계등 자갈해변은 다시 음미해보고 가지 않을수 없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나갈 때,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소리가 들린다. 여행객이 직접 들어봐야지 뭐라고 형언하지 못하겠다. 통일신라 황후와 공주가 와서 이 멜랑꼴리한 소리의 매력에 빠진 뒤, 구계등은 외딴 곳에 있는 황실의 정원이 됐다.
오는 11일까지 청산도에선 ‘슬로길’을 느리게(緩步), 미소 지으며(莞步), 끝까지 걷는(完步) ‘가을의 향기’ 축제가 김제동의 인솔로 진행된다. 마음이 척박했던 고교시절 수십번 외기만 했던 정극인의 미음완보(微吟緩步:낮은 소리 노래를 읊조리며 느리게 걷는 모습)를 이제사 청산도에서 해볼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함영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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