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혜림 기자]서울 유명 미대에 다니는 A 씨는 지난해 한 대기업의 인턴 모집 공고 글을 보고 지원해 인턴 자격을 얻었다. 그런데 인턴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직전, 인사 담당자는 A 씨에 돌연 뜻밖의 말을 했다. “회사 내규가 바뀌어 인턴이라는 말은 쓸 수 없다”며 “계약직으로 계약해야 하는데 그래도 하겠냐”는 것이었다. 업무 경험을 ‘인턴경력’으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 재계약을 하게 됐을 땐 더욱 황당했다. 계약서를 보니 자신은 사업자 등록을 한 개인 디자이너로 표기돼 있었다. 마치 B사의 프로젝트를 맡은 용역업체 대표처럼 둔갑된 것이다. 계약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인사 담당자가 “회사 내규상 회사에서 보관해야 한다”며 가져가 제대로 확인해볼 기회조차 없었다.

전공 특성상 취업을 하려면 실무 경험이 적잖이 필요한 만큼, 많은 미대생들이 휴학까지 감수하며 인턴이나 단기 아르바이트 등에 뛰어들고 있다. 문제는 미술업계가 ‘한 다리 건너면 다 알 정도’로 좁기 때문에 A 씨처럼 부당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을 할 수가 없다는 점. 더욱이 업계에서는 신입보다 경력직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아, 평판에 따라 취업문이 열리기도 닫히기도 하기에 속으로만 앓을 수 밖에 없다.

A 씨도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취업에 어려움이 있을까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며 “나 하나 때문에 회사에서 후배들을 채용하지 않을 것도 걱정됐다”고 털어놨다.

채용 인원이 적어 취업 자체가 그야말로 ‘바늘 구멍’인 순수미술ㆍ현대미술 등의 분야는 상황이 더 좋지 않다. 학예사제도를 악용하는 미술관과 박물관도 있다.

학예사제도란 학예직 종사자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전문성을 공식 인증하기 위해 지난 2000년도에 도입됐다. 졸업 후 몇년 이상 경력인정대상기관에서 일한 뒤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출 시 소정의 절차에 따라 정학예사(1~3급)와 준학예사로 구분해 자격증을 준다.

그러나 일부 미술관ㆍ박물관에서는 경력인정대상기관이 아님에도 이를 속여, 피해를 보는 미대생들이 적지 않다. B(33ㆍ여) 씨도 3년전 서울서 경기도 고양까지 출퇴근하며 고양시의 한 미술관에서 몇 개월간 일했지만 뒤늦게 경력인정대상기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돼 시간만 날렸다. B 씨는 “분명 경력대상인정기관으로 알고 갔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니었다”며 “심지어 담당자는 학예사제도가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2012년 10월에는 한 사립 미술관에서 도슨트(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를 모집하며 도리어 참가비를 받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문화자원 봉사활동에 대한 확인증’을 준다며 일반인에겐 9만원, 학생에겐 7만원을 받았다.

이같은 현실에 대해 A 씨는 “한 해에도 전국의 미대에서 만 명이 넘는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온다”며 “미술이 아니면 갈 길이 없는 손쉬운 대체제가 많으니 기업에서도 ‘싫으면 말고’ 식으로 대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는 이어 “예술가를 쓰다 버리는 ‘말’ 쯤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이런 현실에 한 몫을 하는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역시 이같은 경험을 한 P 씨도 “밥에 도토리로 여기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