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하정우는 유쾌했다. 더운 날씨에 분장 때문에 겪었던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데, 책 한 권으로 엮어도 될 만큼 방대했다. 그의 넉살 덕분에 인터뷰 내내 30초 간격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나중엔 얼굴 근육이 아플 정도였다.

그는 한편으론 깍듯하고 배려 넘쳤다. 앞서 빡빡한 일정을 전해들었던지라 “피곤하시죠?” 한 마디 건넸더니, “괜찮아요. 물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답례한다. 인터뷰 끝엔 “연기하고 연출도 하는 아는오빠가 이런저런 얘기한 것”이라고 그 날의 대화를 요약하는데, ‘이런 아는 오빠만 있다면 심심할 일은 없겠다’ 싶었다.

‘추격자’(2008)의 연쇄살인범, ‘황해’(2010)의 조선족, ‘베를린’(2012)의 북한 특수요원 등, 워낙 어둡고 강렬한 캐릭터가 많이 맡았던지라 유머러스한 하정우는 잊고 있었다. 새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에서는 오랜만에 그의 개그 본능이 꿈틀댄다. 민초들이 수탈당하는 상황에 주먹을 불끈 쥐다가도, 하정우가 연기하는 어수룩하고 낙천적인 ‘도치(돌무치)’ 덕분에 슬며시 웃는다.

캐릭터 편식 없는 대범한 연기 행보, 연출이든 그림이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는 하정우를 보며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궁금했다. “모든 시련이 돌아보면 추억”이라고 말하는 ‘긍정남’ 하정우를 만나고 나니, 그 힘의 원동력을 알 것도 같았다.

#1. “나리, 그간 무고하신게라?” -도치가 ‘조윤’(강동원 분)과 2년여 만에 마주하면서

하정우와 윤종빈 감독이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의 인연은 남다르다. ‘용서받지 못한 자’(2005), ‘비스티 보이즈’(2008),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 ‘군도’까지 벌써 네 작품을 함께 했다.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작품을 선택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0대 중반부터 쌓아온 신뢰가 있었죠. 윤종빈 감독의 영화는 직설적이고 캐릭터에 입체감이 있어요. 어떤 영화는 정말 ‘영화’만 보이는데 윤종빈 영화는 ‘인물’이 보이거든요. 배우 입장에선 연기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재미있죠.”

하정우가 맡은 백정 ‘돌무치’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뒤 화적 ‘도치’로 거듭난다. 1인 2역이나 다름 없는 캐릭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정우 나름의 고민과 계산된 연기가 있었다. “돌무치를 연기할 땐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우를 떠올렸어요. 약간은 어벙하면서도 귀여운 면을 강조했죠. 그래야 나중에 ‘도치’로 성장했을 때 관객들의 쾌감이 더 크지 않을까요? 반면 ‘도치’는 복수심으로 인한 에너지가 추가된, 셰익스피어의 ‘오델로’같은 모습을 생각했어요.”

#2. “나가 갈라요. 나가 기어이 그놈 모가지를 들고 올라요” -탐관오리 조윤 무리와의 일전을 앞두고

‘군도’ 촬영이 시작되자 하정우는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영화에서 민머리로 등장하다보니, 분장에만 3시간씩 공들여야 하는 과정이 곤욕스러웠다. “머리를 확실하게 잘 밀어야 가발도 잘 붙거든요. 보통은 촬영장 가면 커피 마시고 메이크업 하고 이러는데, 전 잠도 덜 깬 상태에서 머리부터 밀었어요. 거기에 애프터셰이브 바르고 파우더 칠하고… 그걸 반복하다보면 10년 전에 화났던 일이 다시 떠오를 정도였죠.(웃음) 말 그대로 자기와의 싸움이었어요.”

머리 분장이 끝이 아니었다. 당시 민초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기 위해 얼굴과 온몸에 검댕을 칠하고 촬영했다. 집에 가서 샤워하는 데만 한시간 반이 걸렸다. 무더위에 온몸을 분장한 상태로 촬영하다 보니, 땀띠가 나다 못해 ‘어우러기(피부 각질층에 곰팡이균이 번식해 반점을 만들어내는 질환)’까지 생겼다. 피부가 완치되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고.

하정우는 ‘이럴 줄 알았으면 개런티를 더 받았어야 했다’고 너스레를 떤다. 사실 본심은 따로 있다. “힘드니 어쩌니 해도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 예전에 제가 말 타다 사고난 적이 있어서 윤종빈 감독이 도치가 말 타는 장면을 빼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도치가 말을 안 타는 건 어색하다는 결론이 나왔고 그냥 촬영했죠. 결국은 배우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3. “누가 저승길로 갈란지는 붙어봐야 아는 것 아니겄소?” -조윤과의 맞대결에서 도치의 한 마디

하정우에게도 무명 시절은 있었다. 오디션에 떨어질 때면 ‘꽃미남이 아니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느긋하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특유의 낙천성을 발휘해 묵묵히 달렸더니, 어느덧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했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요? 너무 감사하죠. 그런 칭찬과 격려를 들으면 열심히 해서 그 말을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대중의 기대치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도 있지만, 그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작품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이 되죠.”

이제 말끔한 ‘실장님’ 역할도 한 번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너무 ‘센’ 캐릭터만 맡는 게 아닌가 싶다. ‘화면에 멋지게 나오고 싶은 욕심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씩 웃어 넘긴다. “비주얼을 생각해서 판단하기 보다, 그 역할을 했을 때 재미있느냐 없느냐가 저에겐 중요하죠. ‘영화작업’이라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감독의 표현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게 더 좋아요. 40대쯤엔 ‘뉴욕의 가을’같은 로맨스를 해보고 싶은 욕심은 있어요.(웃음)”

‘영화감독’ 하정우는 지금...

‘배우’ 하정우를 만났지만, ‘감독’ 하정우의 이야기도 궁금했다. 7억 원이 든 저예산 영화 ‘롤러코스터’(2013)로 감독 입봉을 한 그는, 지금은 제작비 70억 원의 ‘허삼관 매혈기’를 찍고 있다.

직접 연출을 하다보니 깨닫는 바가 많다. “전작 감독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내가 직접 모니터 앞에 앉으니까, 그동안 배우로서 장편영화 30여 편에나 참여하면서도 몰랐던 게 많았구나 싶더라고요.”

그는 메가폰을 잡은 뒤 “할아버지가 돼서도 도전할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고도 말했다. “우디 앨런이 ‘영화라는 작업이 이제는 알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꼭 뒤통수를 친다. 그게 뭔지 알아내기 위해서 지금까지 영화를 찍고 있다’고 했거든요. 전 아직 우디 앨런에 비하면 어리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