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 사만다는 운영체제야.” 망설이던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가 쭈뼛쭈뼛 친구에게 고백한다. 아내와 헤어진 뒤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던 그는, 인공지능 운영체제(OS)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분)를 만나 활력을 되찾는다. 오직 대화로만 교감할 수 있는 상대지만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영화 ‘그녀’>
허무맹랑한 판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테오도르가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미성숙한 남자가 아닐까 의심할 지 모른다. 얼굴도 모를 뿐더러 눈을 마주치거나 손을 잡을 수도 없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다니.
사실 테오도르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이들의 사랑은 사만다가 단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처음엔 사만다도 이메일을 읽어주고 스케줄을 챙겨주는 데 그치지만, 축적된 데이터 베이스와 학습 능력을 바탕으로 하나의 인격체로 진화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보통 연인들처럼 데이트도 즐긴다. 테오도르는 소형 태블릿PC에 그녀를 담아 북적이는 대중교통과 쇼핑센터, 바다를 찾는다. 이들은 우스운 장면에 함께 깔깔대기도 하고, 다른 커플을 보면서 ‘재혼인 것 같다’, ‘남자가 더 사랑하는 게 확실하다’ 속닥이기도 한다. 심지어 (목소리 만으로) 섹스도 한다.
인공지능 OS의 존재는 이미 현실로 다가왔다. 스마트폰 이용자라면 인공지능 대화 앱 ‘심심이’와 수다를 떨거나, 아이폰의 음성인식 기능 ‘시리(Siri)’에게 시시껄렁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만다와 같은 형태를 10년 내 구현하긴 어렵지만, 그 가능성은 최근 확인됐다. ‘우크라이나에 사는 13세 소년’으로 프로그래밍된 인공지능 OS ‘유진’은 심사위원 3분의 1을 속일 만큼 인간에 가까운 소통 능력을 보였다.
SF 걸작으로 꼽히는 ‘블레이드 러너’와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를 그렸다. 반면 ‘에이아이(A.I.)’는 해피엔딩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인간성을 가진 로봇과의 공존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그녀’ 속 인간과 인공지능 OS의 관계는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적 관점으로 평가하긴 무리가 있다.
‘연애 불구’ 상태였던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만나 설렘을 다시 느끼고, 과거 자신의 서툴렀던 사랑을 되돌아본다. 사만다는 테오도르로 인해 인간의 ‘감정’이 알고 싶어지고 ‘몸(身)’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 지 궁금해한다. 테오도르에게 사만다는 소유물도, 누군가의 대체물도 아니었다. 이들은 평범한 연인처럼 소통하고 부딪히기도 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변화해간다. 숱한 SF 영화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이 대립하는 것과 달리, 이들도 ‘주체’ 대 ‘주체’로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이혜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