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창훈 기자] 필리핀이 세계무역기구(WTO)와 협상을 통해 쌀 관세화 의무를 한시적으로 면제받는 대신 의무수입물량을 대폭 늘리기로 합의함에 따라 올해 말로 쌀 관세화 유예 종료를 앞둔 한국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이 집중된다. 관세화, 즉 시장개방으로 가든지 아니면 필리핀처럼 관세화 유예 기간을 연장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 가까워진 것이다.
정부는 이달 말께 WTO의 의무 사항인 ‘쌀시장 개방(관세화)을 전격 선언하고, 쌀 농가의 피해를 막을 ‘쌀산업 발전 종합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농민단체의 이해를 구하고 국회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적잖은 논란과 반발이 예상된다.
WTO 상품무역위원회는 지난 19일(현지 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의를 열어 필리핀의 쌀 관세화 의무를 2017년 6월말까지 유예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필리핀은 이번 협상에서 관세화 의무를 피한 대신 쌀 의무수입물량을 현재 35만t에서 80만5000t으로 2.3배 늘리기로 했다. 또 희망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가별 쿼터를 배정하고 의무수입물량 관세율을 현행 40%에서 35%로 낮춰주기로 했다.
이와함께 필리핀은 5년간의 추가 유예 종료 이후 관세화하기로 약속했다.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진 않았지만 육류 등 다른 품목에 대한 관세 인하도 양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화 의무를 면제 받고 너무 많은 걸 내준 셈이다.
필리핀은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결과에 따라 1995년부터 2004년까지 10년간 쌀 관세화를 유예했고, 2004년 협상을 통해 쌀 관세화를 7년간 연장했다. 이번 추가 유예 요청은 지난 2012년 6월 관세화 유예 기간이 종료된 데 따른 것이다.
WTO 회원국 중 필리핀과 함께 쌀 관세화를 유예받고 있는 나라인 한국은 UR 협상 타결 이후 20년간 관세화를 유예하면서 쌀 시장 개방의 시간을 끌어왔다. 현재 한국의 쌀 의무수입물량은 연간 40만9000t. 만약 한국이 필리핀처럼 관세화 의무를 면제받는 대신 의무수입물량을 늘리면 5년 후에는 연간 94만t을 수입해야 한다. 우리나라 쌀 소비량의 약 20% 규모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의무수입물량이 늘어나 쌀값이 떨어지면 농가에 좋을 게 없다고 보고 있다. 또 정부가 쌀값을 보전해야 하는 ‘변동직불금’ 규모가 늘어나 재정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관세화로 시장을 개방하되 고율의 세금을 매겨 외국산 쌀이 국내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도록 하겠다며 농민들을 설득 중이다.
농식품부 고위 관계자는 “남들 다 가는 군대(관세화)를 안 가겠다고 버티면 그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WTO의 룰”이라며 쌀 관세화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지난 1999년 일찌감치 관세화를 결정한 일본은 외국산 쌀에 대해 kg당 341엔의 정량세를 매기고 있다. 세율로 환산하면 1066%였으며 현재 환율과 가격 기준으로는 약 400%다.
농식품부는 우리가 외국산 쌀에 대해 약 200%의 관세를 매기면 우리나라 쌀값이 미국 캘리포니아산과 비슷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일본 수준인 400%를 매긴다면 외국산 쌀이 국내 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농민단체들은 고율의 관세가 영원하다는 보장이 없고 쌀 시장의 전면 개방은 곧 ‘식량주권의 포기’라는 상징성이 있다며 쌀관세화에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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