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진원 기자]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잊혀진 열사들이 있다.
1987년 1월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며 쓰러 사망했다”고 박종철 열사의 고문 사실을 숨겼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같은해 6월 10일 국민평화대행진을 하루 앞두고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불씨가 커졌다. 박종철ㆍ이한열 열사는 이후 6월 항쟁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러나 6월 항쟁에 스러져 간 이들은 더 많다. 잊혔을 뿐이다.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이들을 조명해봤다.
1987년 5월 17일 오후 4시 20분, 부산 서면 부산상고 앞 복개천도로. 광주 5ㆍ18 6주기를 맞아 열린 집회에 참석한 한 명의 노동자가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달려나왔다.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를 외쳤다.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서 발간한 소식지 ‘민주시민’은 ”전경들이 뛰어와 주위를 에워싸고 그대로 내버려두려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주변 식당의 아주머니들이 소방호스를 들고 나왔다. 옷을 덮고 물을 끼얹어 불을 껐다. 병원으로 옮겨졌다. 황보영국(당시 26세) 열사였다.
아버지 황보문수(87)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흐릿한 목소리로 “병원에 갔더니 이미 경찰이 병원을 두르고 있었다”고 했다. 황보영국 열사는 부산 진구 개금동 소재 백병원 811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민주시민’은 “의식불명의 상태에서도 붕대감긴 손을 움직여 ‘독재타도’를 신음처럼 외쳐”라고 밝혔다.
이후 황보영국 열사의 분신을 최소화 하려는 경찰의 노력이 시작됐다. 경찰은 병실앞에 사복형사를 배치했다. 병원 측과 합세해 면회 사절이라고 죽치고 앉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신부, 변호사, 재야인사 등 외부인을 통제했다.
경찰은 가족들도 협박ㆍ회유했다. 가족들은 “개인적인 문제다”, “경찰이 수고를 많이 한다”고 말하며 황보영국 열사의 분신을 함구했다. 황보문수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들이 매일 같이 2~30명씩 찾아오고 그랬다”고 했다. 경찰은 가족에게 “우리(경찰) 얼굴을 봐서라도 시킨대로 해달라”고 했다. 황보문수 씨는 남은 4명의 자식 생각에 남들이 모르는게 좋겠다 싶었다.
황보영국 열사가 숨을 거둔 이튿날인 26일 아침 9시. 부검 없이 당감동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분신 이전의 생활에 대한 자료와 자문을 얻고자 민가협과 인권위, 부민협에서 수차례에 걸쳐 열사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깨끗이 정리된 상태였다. ‘설마 자식의 일인데 숨기랴’, ‘글 한 줄 찾아내기 어려웠다’고 소식지는 당시 상황을 밝혔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료 담당 최은정 씨는 “당시 소식지를 보면 경찰의 압박과 회유를 못 이겨 유가족이 열사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고 했다.
황보문수 씨는 뇌경색 온 후 해오던 1평반짜리 구멍가게도 접었다. 6ㆍ25 참전용사에게 나오는 28만원과 부인 이순이(80) 여사가 시장에서 나물을 팔아 벌어오는 반찬값이 손에 쥐는 돈 전부다.
황보문수 씨는 아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착한 아이였다”라고만 했다. 아들이 다니던 교회에서 장례식 이후 한 말씀 해달라고 했었다고 했다. 황보문수 씨는 말했다.
“아들을 볼 낯이 없어서 나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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