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보려다 ‘텅장’ 되니 딱 한 편만

조카한테 시달릴 땐 ‘엘사 마법’

전 부치다 뻗었을 땐 ‘핏빛 도파민’

뮤지컬 ‘겨울왕국’ [에스앤코 제공]
뮤지컬 ‘겨울왕국’ [에스앤코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브로드웨이에서 날아온 메가 히트 블록버스터부터 ‘핏빛’ 카타르시스를 뿜어내는 유럽 뮤지컬, 가면 쓰고 호텔을 뛰어다니는 별천지 이머시브 시어터(관객 몰입형 공연),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명작 연극까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봐야할 것이 너무 많은 공연계다. 하지만 쏟아지는 티켓을 다 쥐려다간 연휴 마지막 날, 피로는 극심해지고 통장은 ‘텅장’이 될 지도 모른다. 명절 문화생활의 진짜 핵심은 ‘올킬(All-kill)’이 아니라 내 멘탈을 살려낼 ‘한 방’이다.

온종일 전 부치느라 방전된 영혼, 잔소리 폭격을 맞은 미혼남녀, 조카들의 습격에 멘탈이 털린 어른들까지, 당신의 혈색을 단숨에 되찾아줄 유쾌·통쾌 ‘공연 취향 알약’을 처방한다.

처방전 1. 조카들 떼쓰고 거실 뒤집힐 때 ➔ ‘동심 치트키’ & ‘레트로 감성’

거실 바닥에 뒹굴며 스마트폰 달라고 떼쓰는 조카들과 어색하게 헛기침만 하는 어르신들. 집안 공기가 묘하게 굳어갈 땐 망설이지 말고 극장으로 온 가족을 모시고 튀어야 한다.

복용 공연 : 뮤지컬 ‘겨울왕국’, ‘광화문 연가’

약효 아이들의 혼을 쏙 빼놓을 비장의 무기는 단연 디즈니의 역작 ‘겨울왕국’(샤롯데씨어터)이다. 눈앞에서 극장 전체가 얼어붙는 환상적인 아렌델 왕국의 특수효과에 엘사가 옷을 갈아입으며 ‘렛 잇 고(Let It Go)’가 터져 나오는 순간, 극장은 마법에 휩싸인다. 시종 종알대던 조카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른들은 엘사의 개과천선과 짠한 어린시절의 모습에 눈물 한 방울 쏟을지도 모른다. 정원영 이창호의 완벽한 올라프 실사화는 이 뮤지컬의 백미다.

부모님 손을 잡고 나선다면 고(故) 이영훈 작곡가의 불멸의 멜로디로 엮은 주크박스 뮤지컬 ‘광화문 연가’(디큐브 링크아트센터)가 정답이다. ‘옛사랑’, ‘붉은 노을’ 전주가 흐르는 순간 엄마 아빠는 눈시울을 붉히며 청춘으로 돌아가고, 자녀 세대는 흥얼거리며 박수를 친다. 3대의 어색한 침묵을 1초 만에 녹여버리는 마법의 화해 티켓이다. 손준호 이석훈이 남자주인공 명우를, 그를 과거로 이끌 월하는 차지연과 에녹 서은광이 연기한다.

뮤지컬 ‘드라큘라’ [오디컴퍼니 제공]
뮤지컬 ‘드라큘라’ [오디컴퍼니 제공]

처방전 2. 전 부치다 허리 끊어질 때 ➔ ‘고농도 도파민’ 파티

기름 냄새에 절어 나른하고 무릎과 허리가 뻐근하다면 잔잔한 힐링극은 금물이다. 졸음만 쏟아질 뿐이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화려한 무대와 쩌렁쩌렁한 고음으로 아드레날린을 들이부어야 한다.

복용 공연 : 뮤지컬 ‘드라큘라’ & ‘엘리자벳’

약효 400년을 오직 한 여인만 바라본 흡혈귀의 순애보 ‘드라큘라’(LG아트센터)는 4중 턴테이블 무대와 프랭크 와일드혼의 거대한 넘버로 객석을 집어삼킨다. 2세대 K-팝 그룹 동방신기 출신에서 뮤지컬계 슈퍼스타로 거듭난 김준수를 필두로 신성록 전동석 고은성의 무대를 찢는 절절한 고음이 꽂히는 순간, 명절에 쌓인 묵은 피로가 전율과 함께 싹 씻겨 나간다.

오스트리아 황실의 화려한 궁전 뒤 도사린 초월적 존재 ‘죽음(Tod)’과 황후의 치명적 암투를 그린 ‘엘리자벳’(블루스퀘어) 역시 ‘안구 정화용’으로 완벽하다. 21세기 도심 한복판을 벗어나 눈이 멀 것 같은 화려한 의상과 팽팽한 텐션은 명절 증후군을 한 방에 날려버릴 짜릿함이 기다린다. 김준수가 장악하던 원조 ‘토드’는 카이, 서경수, 고은성이 이어받았다.

처방전 3. 냅다 도망치고 싶다면 ➔ 호텔 질주하는 ‘짜릿한 신세계’

해야할 음식도 설거지도 산더미 같은 명절. 쉬고 싶었는데 음식하랴, 조카보랴 정신없고, 명절에도 ‘취업 준비’와 시험 준비로 스트레스가 떠나지 않을 때, 이대로 증발해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충무로의 매키탄 호텔로 초대한다.

복용 공연 : ‘슬립노모어(Sleep No More)’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모어’ [미쓰 잭슨 제공]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모어’ [미쓰 잭슨 제공]

약효 극장 문을 여는 순간 관객은 하얀 가면을 쓰고 1930년대 거대한 호텔 세트장 안으로 내던져진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주요 뼈대로 삼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로도 익히 알려진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의 일부 요소를 차용한 화제의 공연이다.

눈앞 10㎝ 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격렬한 신체언어로 연기를 대신하는 배우들을 쫓아 관객은 계단과 비밀의 방을 질주한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은 채 미로를 헤매는 쾌감은 그 어떤 해외여행보다 아찔한 해방감을 안긴다. 심지어 광란의 테크노 파티는 그 어떤 도파민보다도 짜릿한 소름이다.

복용 주의사항 장장 3시간, 최소 1만 보 이상 걸어야 한다. 운동화는 필수. 우연히 어딘가에서 사탕이 담긴 소품을 발견한다면 주저없이 입에 넣어라. 저혈당 관객들을 위한 제작사의 배려다.

처방전 4. 잔소리에 체했을 때 ➔ 뉴욕 거리의 날것 그대로

끝끝내 듣고 싶지 않았던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이 난무하는데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는 말만 귀에 맴돈다. 뻣뻣한 잔소리에 얹혔다면, 거리의 거친 생명력과 쫀득한 비트로 온몸의 관절을 풀어줄 때다.

복용 공연 : 뮤지컬 ‘헬스키친(Hell’s Kitchen)’

약효 ‘그래미의 여왕’ 앨리샤 키스(Alicia Keys)의 음악으로 빚어낸 최신 브로드웨이 화제작이다. 뉴욕 맨해튼의 거친 골목 ‘헬스키친’(GS아트센터)에서 꿈을 찾아 부딪히는 청춘의 성장통을 폭발적인 R&B와 소울로 쏟아낸다. 심장을 때리는 라이브 밴드의 생생한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다 보면, 가식적인 명절 스트레스 따위는 쿨하게 털어버릴 수 있다.

연극 ‘스미레 미용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스미레 미용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처방전 5. 홀로 남은 연휴 ➔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질긴 생명력’

텅 빈 서울에 남아 고립감이나 쓸쓸함이 밀려온다면, 가벼운 위로 대신 온몸을 전율케 하는 뜨거운 인간애와 질긴 생명력을 지닌 무대가 최고의 보약이다.

복용 공연 : ‘스미레 미용실’

약효 1960년대 일본 규슈의 삭막한 탄광촌, 가난과 차별 속에서도 미용실을 거점 삼아 억척스럽게 삶을 일군 재일 한국인들의 애환을 담아냈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탄광 폭발 참사라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을 정면으로 통과하면서도, 절망에 무릎 꿇는 대신 질척거리는 슬픔을 웃음과 농담으로 털어넘기는 인물들의 에너지가 압도적이다.

“살아남았으니 또 살아가야 한다”며 서로의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져주는 이들의 눈물겨운 연대와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객석의 가슴을 뜨겁게 흔들어 깨운다.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기어코 유머를 잃지 않는 이들의 거친 생명력을 마주하는 순간, 나 홀로 명절의 적적함 따위는 단숨에 씻겨 내려가고 내일을 살아갈 단단한 힘이 차오른다. 공연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날 수 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