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vs 대법원…‘서면 제청’ 진실공방 계속
손봉기 판사 국회 임명동의 절차 미진행 가능성
위헌 소지 논란 우려도…“국회 동의 권한 침해”
[헤럴드경제=양근혁 기자] 조희대 대법원장의 대법관 후보자 ‘서면 제청’을 둘러싼 청와대와 대법원의 갈등이 헌정사상 초유의 대법관 임명 거부 사태로 번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청와대가 조 대법원장이 제청한 2명의 후보자 가운데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에 대한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사실상 재제청을 요구하는 방안을 검토하면서다. 법조계에서는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을 사실상 반려할 경우 헌법이 정한 대법관 임명 절차를 둘러싼 위헌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4일 정치권과 법조계에 따르면 청와대는 조 대법원장이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제청한 손 부장판사에 대해 임명 절차를 밟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흥구 대법관 후임으로 함께 제청된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국회 임명동의 절차를 진행하되, 손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임명동의안을 국회로 보내지 않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앞서 조 대법원장은 지난 3월 퇴임한 노 전 대법관의 후임으로 손 부장판사를, 다음 달 퇴임하는 이 대법관의 후임으로 김 부장판사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18일 임명 제청했다. 그간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직접 만나 후보자를 제청해 온 관례와 달리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서면으로 제청이 이뤄지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청와대와 대법원 사이에서는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사전 협의 여부와 서면 제청 방식을 둘러싼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은 지난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서면 제청에 대해 “민정수석과 합의해서 정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성기홍 청와대 홍보소통수석은 이튿날인 21일 유튜브 채널 오마이TV에 출연해 “대법관 제청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을 논의한 사실은 있지만 서면 제청 여부 등 구체적인 제청 방식에 대해 전혀 협의 자체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서면 제청을 사전에 조율했는지를 두고 상반된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청와대가 손 부장판사의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을 경우, 대법원으로서는 새로운 대법관 후보자를 다시 제청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대법원은 현재까지 후보자 재제청 여부와 관련해 “정해진 것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실제 제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후속 절차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법원조직법상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는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자를 제청할 때마다 구성되기 때문에 손 부장판사 제청이 사실상 무산되면 후보자 천거와 추천위원회 구성·심사 등 인선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 대법관 후보자가 제청 이후 임명되지 못한 사례는 있었지만 이번 사태와는 성격이 다르다. 2012년 이명박 정부 당시 김병화 대법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 과정에서 각종 의혹이 불거지자 스스로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대법원은 추천위를 다시 구성해 후임 후보자를 선정했다.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후보자를 요구해 재제청 절차로 이어진 전례는 없었던 것이다.
앞서 노 처장은 지난 20일 법사위에서 노 전 대법관 후임으로 추천됐던 후보자들에게 전화해 후보 추천 절차를 다시 진행하는 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그 결과 일부는 동의하고 일부는 반대했다는 사실도 밝힌 바 있다. 노 처장은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 앞에 추천된 네 분에 대해 새로 추천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은 어떠냐는 아이디어가 있었다”며 “그 아이디어가 성사되려면 추천된 네 분이 모두 동의하셔야 한다”고 설명했다.
손 부장판사 제청이 무산되면 대법관 공백 장기화도 불가피하다. 노 전 대법관이 지난 3월 퇴임한 이후 이미 약 5개월 동안 한 자리가 비어 있는데, 다음 달 7일 이 대법관까지 퇴임하면 대법관 공석이 두 자리로 늘어나게 된다. 손 부장판사에 대한 제청 절차가 원점으로 돌아갈 경우 노 전 대법관 후임 공백은 상당 기간 더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법원 내부를 비롯한 법조계에서는 청와대가 손 부장판사의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보내지 않은 채 대법원장에게 새로운 후보자 제청을 요구하는 것이 헌법상 권력분립 원칙과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법 제104조 제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다. 법원조직법에도 같은 내용의 규정이 있다. 대법관 임명 과정에서 대법원장에게는 제청권을, 국회에는 동의권을, 대통령에게는 최종 임명권을 각각 부여한 구조다. 문제는 헌법이 대통령에게 대법원장이 제청한 후보자를 ‘반려’하거나 다른 후보자를 다시 제청하도록 요구할 권한이 있는지를 별도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회 임명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후보자 임명을 사실상 거부하는 경우, 대법원장의 제청권뿐 아니라 국회가 후보자의 임명 여부를 판단할 동의권까지 침해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법관 출신 변호사는 “대법원장의 권한인 제청은 이미 이뤄지지 않았나”라며 “이에 대해서 대통령이 국회에 인사청문회 요청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 국회 권한을 침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한 현직 부장판사는 “현재는 제청이 서면으로 이뤄지게 된 것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이 엇갈리고 있는데, (향후 청와대가) 제청을 거부하게 되면 위헌인지 아닌지가 논란이 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청와대가 손 부장판사의 임명동의안을 일단은 국회에 제출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국회가 임명 동의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인사청문회를 거쳐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임명동의안은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이 있어야 통과된다. 161석을 보유한 거대 여당인 민주당이 반대할 경우 후보자 임명동의안의 본회의 통과는 사실상 어려워진다. 이 경우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을 직접 거부했다는 논란은 피할 수 있지만, 여야 간의 극한 대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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