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葛·칡 갈)과 등(藤)은 홀로 설 줄 모른다. 옆 나무에 엉겨붙어야 자랄 수 있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옛날 선비들은 갈과 등을 소인배에 빗대었다. 둘은 함께 있으면 안 된다. 칡덩굴은 왼쪽으로, 등줄기는 오른쪽으로 감아 오르며 다른 한쪽을 숨 못 쉬게 하기 때문이다.

엉망으로 뒤엉켜 낭패로 이어지는 갈등. 그 어두운 그림자가 오늘 우리 대한민국을 짓누르고 있다. 목소리 크면 무조건 이기는 줄 알고 핏대를 올리며 내 편, 네 편 가른다.

통계청이 밝힌 ‘2024 한국의 사회지표’는 심각하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있다고 느낀 국민이 77.5%, 빈곤층과 중상층 74.8%, 근로자와 고용주 66.4%였다. 종교·남녀 간 갈등을 느낀 국민도 50%를 넘었다.

이렇게까지 생각의 골이 깊었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싶지만 마냥 걱정거리는 아니다. 갈등 없이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은 없었고 인류의 역사가 곧 갈등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산업혁명·정보혁명 그리고 새 시대의 창조혁명·소셜혁명·스마트혁명·AI혁명까지 모두 사회갈등·경제갈등·정치갈등 속에 이뤄졌다. 다양한 목소리를 잘 조정하면 위기를 넘어 더 나은 세상으로 갈 수 있다.

다만 두려운 건 조정간을 잡은 사람들이다. 우리 국민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덕 본 것도 없으면서 몸 바쳤고 슬기와 용기로 위기를 헤쳐 나갔다. 지금도 모이면 두 쪽이 나게 된 나라를 걱정한다.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간 혹여 옆 사람과 시비가 붙을까 싶어 조용히 소근거리면서.

그러나 나랏일 한다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우선이고 내 편이 먼저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세의 유불리를 계산하면서 두 쪽이 나든 세 쪽이 나든 개의치 않고 무지막지하게 몰아치기를 한다. 갈등의 조정자가 되어야 할 위치에서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칡덩굴과 등나무 줄기는 만나면 필연적으로 뒤엉킨다. 살아가는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더러는 멋지게 함께 산다. 휘감으며 부딪칠 때 살포시 눌러 서로가 서로에게 억눌리지 않는다. 자연의 힘이다.

함께 큰 등나무는 푸르름이 한창인 5월에 탐스러운 연보라 꽃을 주렁주렁 늘어뜨린다. 사방으로 뻗은 잎들은 풍성한 그늘을 만들어 한 여름 무더위를 식혀준다.

칡꽃은 여름이 조금씩 넘어갈 때 꽃을 피운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주색 칡꽃은 수줍은 시골 처녀의 뒷태처럼 은근하다. 나름의 향기로 코를 간지럽히는 갈과 등인데 칡은 뿌리부터 꽃까지 버릴 게 없다. 약초로, 차로 두루두루 쓰인다. 등꽃은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아이들의 배고픔을 잠시나마 달래 주던 입가심 거리였다.

갈등도 다르지 않다. 목소리를 살짝 낮추면 된다. 저편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극도의 이기심을 조금만 누르면 된다. 소통의 마당을 통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임을 알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매일매일 새롭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화·경제·기술의 대한민국 물결이 세계를 출렁이게 하고 있다.

정치만 늘 갈팡질팡이다. 그들이 그리해도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이 워낙 현명하니까. 그래도 저들이 늦게라도 잘 어우러진 칡꽃과 등꽃의 향기를 맡을 줄 알게 되면 참 좋겠다. 갈등을 풀고 새 길로 나갈 때다.

이영만 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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