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요즘 한국이 처한 상황이다. 국제 정치 질서와 경제 흐름에서 ‘난 누구, 여긴 어디’의 느낌이다. 얼마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다녀온 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속내가 궁금했다. 그는 미 행정부가 한국의 리더십 교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면서 한국의 정치 상황이 정리되면, 북한에 특사를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공화당 관계자의 전언이라고는 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의 현 야당에 대한 부정적 기류도 있는 듯하다고 했다. 대북 문제에 있어 한국이 배제되는 ‘코리아 패싱’이 우려되는 대목이었다. 머릿속을 맴돌던 걱정이 더 커지고 있다. 최근 트럼프의 행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달 말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트럼프는 미국의 일방적 종전 구상을 압박했다. 젤렌스키는 반발했다. 트럼프는 바로 군사원조 중단을 언급했고 이후 젤렌스키는 사과하며 꼬리를 내렸다.
한국은 미국과 ‘동맹’이다. 여기에만 기댈 수 없다. 한국을 둘러싼 러시아·중국·북한과의 관계에서 ‘우크라이나식 패싱’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특히 미국에 이익이 되는 사안이라면 말이다. 통상 등 경제 분야에서도 미국이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5일 의회 연설에서 한국을 대외관계에서 ‘손해’를 보고 있는 대표적인 나라로 거론했다. 한국에 대한 청구서다.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반도체법 폐지도 언급했다. 총 7조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기로 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우리가 알던 미국과 지금의 미국은 완전히 다르다. ‘관용과 개방’의 매혹적인 강자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응징과 폐쇄’로 군림하는 강자가 됐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각종 정치·경제 정책들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이익은 미국이 취하고, 물가상승과 소비부진에 따른 글로벌 경기침체의 부작용은 전 세계가 함께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시원한 해답은 없다. 한국이 주도권을 잡기는 쉽지 않다.
트럼프가 요청한 알래스카 가스관 사업 참여 등 미국의 비위를 맞추며 시간을 벌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힘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
특히 대북 문제 논의 시 ‘코리아 패싱’만은 막아야 한다. 정치 외교 분야에선 대중 전략에 있어서 동맹인 한국의 역할을 강조해야 한다. 통상 등 경제적 이슈에서도 조선·원전 등 한국 산업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내 정치적 안정과 혁신 기술력 확보를 위한 지원은 필수 요건이다.
트럼프 시대의 대미 관계에서 ‘낙관’은 금물이다. 각종 압박을 협상용 허언으로만 치부해선 안된다. 트럼프를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 흐름을 냉철히 분석하고, 모든 경우를 대비한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가용 수단은 총동원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 ‘반도체 주 52시간제 예외’ 같은 필수적 지원 정책에 한국의 정치적 역량이 소진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여·야·정이 똘똘 뭉쳐 국정 협의를 해나가도 부족하다. ‘트럼프 시대’는 각국이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의 다른 말임을 뼛속 깊이 명심해야 한다.
권남근 뉴스콘텐츠부문장 겸 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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