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여 년 전 어느 날의 한 송별연.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모여 저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고 떠들며 취흥을 돋웠다.
주고받은 술잔에 거나해진 송강 정철이 가장 먼저 읊었다. “청명한 밤, 밝은 달빛을 살짝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 소리.” 일송 심희수가 뒤를 이었다. “단풍 깊게 물든 먼 산 봉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서애 유성룡이 애주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새벽 잠결 창을 두드리는 술 방울 떨어지는 소리.” 가장 젊은 월사 이정구는 오히려 점잔을 뺐다. “산골 초가집에서 뛰어난 젊은이가 시 읊는 소리.”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이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깊은 밤 그윽한 방에서 고운 님 치마 벗는 소리.” 모두들 박장대소하며 최고라고 외쳤다.
조선 시대 설화집 ‘고금소총’이 홍만종의 ‘명엽지해’에서 따온 글이라며 소개한 장면이다. 해학과 양반 풍자로 가득 찬 ‘고금소총’이 굳이 이 글을 넣은 이유는 아마도 젠체하지 않고 인간 본능의 소리를 솔직하게 읊은 백사의 ‘치마 벗는 소리’ 때문이지 싶다.
학문하는 선비들의 이 같은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아름다운 소리에 반해 서민들은 아름답고 좋은 생활속의 4가지 소리를 꼽았다.
갓난 아기 우는 소리, 아이의 글 읽는 소리, 저잣거리의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 그리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여인네의 다듬이 소리….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도 솔바람 소리, 시냇물 소리, 거문고 소리, 바둑 두는 소리, 섬돌에 비 떨어지는 소리, 창 밖에 눈 흩날리는 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꼽으면서도 그중 최고는 ‘내 아이의 글 읽는 소리’라고 했다.
한결같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아름다운 소리들이지만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툭하면 마음이 꺾이는 우리네에겐 그런 것 보다 다정한 사람들이 던지는 ‘아름다운 소리’가 더 필요할 듯 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리’이기도 한데 여러 나라에서 수차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나온 소리는 ‘사랑합니다’였다. 연인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 친구, 직장 내 동료, 선후배 사이에서 모두 통용되는 단어로 ‘들으면 행복해진다’고들 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힘내세요’ ‘괜찮아?’도 ‘사랑해’와 비슷하게 듣는 이를 행복하게 하는 말들이었다. 이들 말은 듣는 사람뿐 아니라 하는 이도 행복하게 만든 아주 특별한 소리들이었다. 이들 말이 하는 이와 듣는 이를 모두 행복하게 하는 이유는 그 말속에 배려하는 마음, 함께 느끼는 마음, 그리고 정이 듬뿍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벌써 2월이다. 다른 해보다 이른 설날도 지나갔으니 음력이든 양력이든 을사년이 확실하다. ‘푸른 뱀’은 성장, 발전, 지혜로운 변혁을 뜻한다지만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왜 더 먼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로 뒤숭숭하니 그럴 만 하겠지만 세상살이가 다 그러니 굳이 을씨년스러워할 필요 없다. 무슨 일이든지 잘되면 다 당신 덕분이라고 말하고 하다못해 ‘겨울이 가는 것도 봄이 오는 것도 다 당신 덕분’이라며 고마워하며 ‘괜찮아질거야’라고 힘든 사람 위로하면서 사랑하면 올 한 해도 을씨년스럽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모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영만 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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