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가 ‘놀다 죽자’고 만든 판 세계 남녀노소가 ‘떼창’으로 화답
고전적 서사구조 파괴한 웹툰 노골적 성적농담·시사풍자 ‘SNL’ ‘광해’속 광해보다 더 왕같은 광대… 비주류의 솔직함에 대한민국 열광
“전 태생이 ‘B급’입니다. 솔직히 저는 B급을 좋아합니다. B급 문화를 만들 때 소스라치게 좋습니다.”
올 하반기 지구촌을 들었다 놓은 가수 싸이는 지난 9월 25일 귀국 기자회견을 ‘B급 문화에 대한 찬사’로 시작하고 끝냈다. 지난 2001년 1월 데뷔 앨범 ‘Psy from psycho world’부터 자신을 ‘사이코’이자 ‘쌈마이(3류)’이며, ‘양아치’이고 ‘B급’이라고 내세운 싸이가 올해 일으킨 폭풍은 거대했다. 지난 7월 15일 6집 앨범 ‘육갑’을 출시한 이래 한국에서 미국 유럽 호주 남미까지 온통 싸이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빠는 강남스타일’을 반복하는 노랫말과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거듭하는 뮤직비디오, 쉽고 단순한 스텝의 말춤이 어우러진 앨범 타이틀곡 ‘강남스타일’로 인종과 성별, 노소를 불문하고 전 지구촌에서 온통 난리였다.
대한민국의 문화사상 전무후무한 경이였다. “수출 100만달러 돌파”와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스포츠 승전보가 ‘대한국민’으로서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게는 꿈에서조차 만나기 힘들었던 풍경이 세계 곳곳에서 펼쳐졌다.
한류의 세대, 2002년 한ㆍ일 월드컵 4강 세대에게도 충격이긴 마찬가지였다. ‘강남스타일’엔 태극기 휘감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애국적인 구호도 없었고, 그라운드에서 쓰러지겠노라 붕대를 감고 죽어라 뛰는 ‘투혼’도 없었다. 멋진 외모와 근사한 몸매로 뭇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한 배용준, 장동건, 원빈 같은 ‘만인의 연인’도 없었다.
정희조 기자/chehco@heraldm.com 121004 4일 싸이가 서울광장에서 약5만관객이 모인가운데 라이브공연을 갖고 있다. 정희조 기자/chehco@heraldm.com 121004 4일 싸이가 서울광장에서 약5만관객이 모인가운데 라이브공연을 갖고 있다. 정희조 기자/chehco@heraldm.com 121004 4일 싸이가 서울광장에서 약5만관객이 모인가운데 라이브공연을 갖고 있다. 정희조 기자/chehco@heraldm.com 121004
‘그라운드의 전사’ 대신 무대 위에는 홀로 소주 병나발을 부는 ‘돌아이’와 소파에 죽치고 앉아 어젯밤 나이트클럽에서 낚았던 여자를 자랑하는 ‘날라리’가 있을 뿐이었다. 배에는 식스팩의 복근을 새긴 멋진 미남 대신, 둥글넓적한 얼굴에 찢어진 눈과 배불뚝이 몸매의 ‘루저’가 있었다. 부모들이 말렸던 ‘양아치’와 사회가 배척했던 ‘쌈마이’가 ‘놀다 죽자’고 만든 판에 세계의 남녀노소가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어설픈 한국어로 “오빠는 강남스타일”을 ‘떼창’했고, 말춤을 췄다. 그 대열엔 세계의 석학 노엄 촘스키와 중국의 반체제 미술가 아이웨이웨이로부터 스페인에서 실업에 항의하는 젊은이에, 미국 명문대의 대학생, 남미의 청춘들까지 함께했다.
‘B급’의 습격이라 할 만했다. 고급스럽고 세련되며 우아하고 도시적이며 교양미 넘치는 주류, 곧 ‘A급 문화’ 대신 ‘싼티ㆍ촌티ㆍ날티’를 내세우는 B급 문화의 코드가 국내 대중문화를 지배한 한 해였다. 고상하고 세련된 문어체 대신에 직설적이며 통속적인 디지털 구술 문화에 젊은이들은 매료됐다. 지상파의 점잖은 뉴스나 시사토론 대신에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정치 폭로와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담은 팟캐스트 ‘나꼼수’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1020의 젊은이와 3040의 직장인들은 매일 조석과 강풀의 웹툰을 ‘스크롤’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웹툰은 고전적인 서사구조를 파괴했고, 논리를 비약한 작품이 많다는 의미에서 B급 정서에 기대고 있었다. 우리 식으로는 오합지졸, 서구식으로는 ‘루저’들의 난장을 담은 ‘무도(무한도전)’와 의미 없는 말장난 및 현실의 비틀기가 섞인 ‘개콘(개그콘서트)’의 인기는 여전했다.
노골적인 성적 농담과 묘사, 노출, 시사 풍자를 불사하는 ‘SNL(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은 메이저 미디어의 프로그램이 보여줄 수 있는 ‘B급 정서’의 한계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대선판을 뒤흔든 안철수 신드롬의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 유치한 분장과 ‘톡 까놓은’ 질문으로 특징 지워지는 토크쇼 ‘무릎팍도사’라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영화 ‘도둑들’은 역사적인 소재를 담지도 않았고, 거창한 주제의식을 내세우지 않은 순수한 오락 장르 영화로는 처음으로 1000만명을 돌파했다. 이 작품은 B급 액션영화의 정서도 물씬했지만, ‘재미있으면 된다’는 맥락에서 ‘놀다 죽자’는 싸이의 정서와 다르지 않았다. 또 다른 1000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자. 점잔빼며 고상한 척하면서도 뒤로는 온갖 악행을 다하는 고관대작들 틈에서 백성을 위한 ‘진짜 왕’이 된 것은 저잣거리에서 웃음을 팔고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권력을 비웃던 ‘광대’였다. 광대야말로 당대의 저류 문화, 지금으로 치자면 B급 문화의 ‘아이콘’이 아니던가. B급 문화가 ‘주류’를 습격해 왕위에 오른, 올 한 해 대중문화계에 대한 이보다 더 정확한 비유가 있을까?
이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