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박영서 특파원]1931년 9월18일 밤 일본 역사상 최대의 자작극이 펼쳐졌다. 바로 류타오후(柳條湖)사건이다.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1개 분대를 비밀리에 파견해 선양(瀋陽) 북쪽 류탸오후 부근의 남만주철로를 기습폭파했다.
그리고 중국 동북군 군복을 입은 중국인 시체 3구를 현장에 남겨놓아 철도폭파가 중국인의 소행이라는 증거로 삼았다.
관동군 사령부는 폭파사건이 ‘동북왕(東北王)’ 장쉐량(張學良) 휘하의 동북군 소행이라고 발표한 후 19일 새벽 선양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 만주침략의 막을 올렸다. 만주사변은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실행한 작전이었다. 본국 정부는 물론 천황에게도 비밀로 했다. 작전은 2명의 영관급 우익장교의 머리에서 나왔다.
‘육군의 이단아’로 불렸던 관동군 작전주임참모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중령, 종전후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板垣征四郞) 대령이 짠 침략시나리였다.
이렇게 정부통제를 벗어난 일본 군부의 독단적인 행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결국 만주사변부터 시작된 15년에 걸친 전쟁에서 일본은 자국민 310만명뿐 아니라 중국인을 비롯한 2000만명 이상의 아시아 민중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지난 18일은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된 류타오후 사건이 발생한 지 8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오전 황금빛 옥수수 물결로 넘실대는 만주벌판에선 방공경보가 일제히 울려펴져 만주사변의 치욕을 일깨우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기렸다.
동시에 중국 전역에선 하루종일 봇물터진 듯 역대 최고규모의 반일시위가 일어나 반일 정서가 최고조로 치솟았다.
중국 도시 120여곳에서 최대 수십만명이 반일 시위를 벌이면서 일본공관에 생수병과 돌을 투척했고 일본계 상점과 식당이 습격을 당했다. 혼다, 도요타, 닛산 등 일본계 기업들은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일본 정부는 이날 하루종일 중국 내 자국민 보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반일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의 격분에 찬 표정을 보면 과거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모습마져 연상된다.
올해 중국과 일본이 역사적으로 뜻깊은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맞이하지만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尖閣>열도) 영유권 분쟁이 터지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추락하고 있다.
양국 모두 영토 문제로 국민감정이 악화한 데다 권력교체기를 맞는 국내 정치적 요인까지 가세하면서 사태의 장기화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중국의 급부상과 일본의 발언권 확대, 여기에 미국의 아시아 복귀라는 지각변동 속에서 동북아시아의 두 대국이 내뿜는 거대한 에너지가 댜오위다오에서 충돌해 맹렬히 불타고 있다. 곁으로는 과거사를 내걸고 있으나 실상은 현재와 미래의 이해관계를 건 한판 승부다.
‘극단(極端)’이란 수레바퀴는 한번 가속도가 붙으면 누구도 멈출 수 없게 되어있다. 81년전 일본의 광기가 아시아 전체를 피를 물들이면서 파멸로 끝난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동북아에 평화보다 대결의 분위기가 급속히 조성되면서 광란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불퇴전의 투혼보다는 대화와 소통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한국 역시 ‘남의 일’이라고 넘겨버려서는 안 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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