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을 찾아가던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이 격랑에 휩싸였다. 지난주 유럽연합(EU) 정상이 합의한 구제금융안에 대해, 그리스가 국민투표를 통해 수용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국민투표가 부결될 경우, 가까스로 도출한 유로존 위기 해결책은 물거품이 된다. EU정상들은 그리스가 유로존 운명을 두고 위험천만한 도박을 벌이고 있다고 일제히 비난했다. 그리스가 자국 국민들과 함께 치킨게임을 벌인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리스 정부는 국민투표를 예정대로 강행한다는 방침이다. 그리스발 재정위기로 고통받아온 유로존은 분노에 휩싸였고, 시장은 돌발악재로 요동치고 있다.
▶ 그리스 치킨게임 점입가경=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31일(이하 현지시간) EU 2차 구제금융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EU 정상들은 지난주 그리스의 국채 손실률 50% 확대와 1000억 유로 추가 제공을 내용으로 하는 2차 지원안을 제시하면서 긴축정책을 전제 조건으로 내놓았다. 이에 대해 자국 국민의 반발이 거세지자, 그리스 총리는 국민투표 카드로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속셈이다. 이와 함께 자신의 신임을 묻는 투표도 함께 의회에 요청했다.
국민투표는 세부안 마련 등 절차를 거쳐 내년 초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 신임 투표는 4일 치러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 정부는 EU 각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를 강행한다는 방침이다. 그리스의 앙겔로스 톨카스 정부 대변인은 4일로 예정된 신임투표에서 승리해 총리가 발표한 그리스 2차 지원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계획대로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만약 국민투표에서 2차 구제안이 부결되면 그리스는 아무 대책 없이 디폴트(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 경우 유로존과 세계 경제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다시 한번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 노련한 승부수 혹은 무모한 도박= 그리스 총리의 결정에 대한 외신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이번 결정은 구제금융에 대한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파판드레우 총리가 벼랑 끝에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주 EU 정상회의 동안 파판드레우 총리는 뭔가 곰곰히 생각하며 고립된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가 전세계에 충격파를 던질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했다”고 전했다. 올해 59세인 파판드레우 총리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그리스 최고 정치 집안 출신이다.
가디언은 파판드레우의 결정을 ‘정치적 할복(harikari)’이라고 표현했다. 그리스 총리가 국민투표 카드를 던진 것은 그리스 국민들이 반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고도의 노림수라는 분석이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리스 국민 가운데 60%는 구제금융에 반대하지만 70%는 유로존에 남길 원하고 있다. 가디언은 “유권자들은 보수적이어서 현 상황에 안주하기를 원한다”면서 “유로존을 뛰쳐나가 디폴트를 선언하는 것보다 유로존에 남는 방향을 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투표로 시간을 번 파판드레우 총리가 EU와 협상을 통해 그리스 긴축을 완화하는 쪽으로 타협을 이끌어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파판드레우 총리는 시소를 타고 있다”고 평했다. 이어 “그는 그리스의 운명을 그리스 국민과 그의 반대편에 선 자들의 손에 올려놓았다”면서 “이는 유로존을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 하는 결정 앞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여당 의원 탈당 등 역효과도 가시화됐다. 반대파들은 파판드레우 총리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분란을 일으켰다고 악평했다.
총리의 뜻대로 그리스인들이 따라줄지도 불투명하다. NYT는 “많은 그리스인들은 외국인들이 그리스에 감놔라 배놔라하는데 지쳤다”고 전했다. 한 그리스인은 “이번 투표로 정부 긴축안에 종신형이 선고될 것이다. 우리는 무슨 대가를 치르던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 혼란에 빠진 세계 시장=미국 뉴욕과 유럽 증시는 그리스의 국민투표 제안 소식에 일제히 폭락했다.국제유가도 유로존 재정위기에 대한 우려가 재발하면서 하락했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도 이날 그리스의 국민투표가 유럽 금융시장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피치는 국민투표 부결시 “무질서한 디폴트로 이어지면서 유로권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도경ㆍ신수정기자/kong@herald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