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날개에 숨긴 칼 (33)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유호성이 빨간색 고쟁이를 걸친 후에야 선장은 승객들을 멀찌감치 물러서도록 했다. 어찌 되었든 사태가 수습되어야 배가 떠날 수 있었으므로 승객들은 두 여자를 등진 채 하릴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숙녀 분 몸에 붕대를 다 감을 때까지 뒤돌아보시면 안 됩니다.”
현성애는 승객들에게 다시 한 번 일침을 놓은 후에야 김지선을 일으켜 앉히고 모래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두 여자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주변의 공기는 냉랭하게만 여겨졌다. 애초부터 사냥꾼의 심정으로 나선 현성애와, 아직은 상황의 자초지종조차 모른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모래밭에 걸터앉은 김지선의 본능적인 대치가 이루진 탓이었다.
“자 두 팔을 벌리세요.”
파도소리가 들려오는지, 바람소리가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뼘 간격으로 붙어 앉은 현성애와 김지선 사이에는 어색한 숨소리만 교차하고 있었다. 어쩌면 호흡 사이에 묻힌 가느다란 떨림마저도 들릴 지경이었는데,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서로의 숨소리만으로 질투의 절정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었다.
“호성 씨와 사귄지 오래 되었나요?”
현성애가 먼저 물었고,
“댁은 호성 씨와 어떤 사이예요?”
하고 다그치는 쪽은 오히려 김지선이었다. 현성애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필경 그녀는 현성애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강요하는 것이 분명했다. 긍정적인 대답이란? 물론 서로 간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냥 직장 선후배 사이예요. 그쪽은 호성 씨와 장래를 약속한 사이인가요?”
현성애가 이렇게 물었으나 김지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 못하시는걸 보니 심각한 사이는 아닌 모양인데, 어쩌다가 무인도에서 이런 꼴을 당하셨어요?”
현성애는 대뜸 가시를 세웠으나 김지선은 의외로 당당했다. 그녀는 더 이상의 대답을 하기도 싫다는 투로 모래밭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어서 몸에 붕대나 감아달라고 재촉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주눅이 든 쪽은 현성애였다. 그녀가 두 발로 버티고 일어서자 몸의 굴곡이 눈앞에 훤히 드러났는데, 이제 막 석양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햇살을 받아 음영이 생겨나서인지 한결 풍만한 위용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키가 무척 크네요. 몸매도 좋고요.”
현성애는 김지선의 태도를 상당히 도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웬걸, 보면 볼수록 주눅이 드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170은 훨씬 넘을 듯한 늘씬한 키에 등판으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 그리고 37인치에 육박하는 탐스런 젖가슴의 윤곽이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허리마저 잘록했으니… 그런 완벽한 몸매에 붕대를 감고 있는 제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누구신지 몰라도 엄청난 위기상황에 나타나서 날 구해주셨네요. 꼴은 우습지만… 붕대라도 친친 감아 몸을 숨기니 이제야 안심이 돼요. 난 김지선이라고 해요. 유호성 씨가 랠리에 출전할 때 코-드라이버로 함께 뛸 사이예요.”
“아! 그래요?”
김지선의 그 말 한 마디에 현성애는 마법에 걸린 듯이 아득해지고야 말았다. 붕대를 친친 감고 햇빛을 등진 그녀의 실루엣은 랠리에 출주하기 전, 패독으로 향하는 레이서의 당당한 모습과도 흡사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길이 마주치기만 해도 숨이 멎을 것 같은 레이싱계의 여제… 붕대를 친친 감았어도 애초에 기대했던 이집트 미라의 해괴한 간지를 찾아볼 수 없자 현성애는 울컥 실망감에 젖어들 뿐이었다.
그러나 유호성의 모습은 영락없는 광대였으니… 현성애는 일단 그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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