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죽음의 계곡 (1)
글 채희문/그림 유현숙
피 같은 현금 500억 원을 자본금으로 납입하고 ‘런런런 SPC 주식회사’를 출범시키던 날, 유민 회장은 혈압이 도져 쓰러질 지경이었다. 사업을 총괄하고 운영관리를 도맡는 주체로 정해진 ‘ABC 컴’의 대표를 그날 아침에야 만나볼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아니? 그럼 어르신께서 직접 이 사업을 총괄하시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동안 이 엄청난 랠리사업을 총괄하는 단체가 ABC 컴이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그 단체의 실질적인 대표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국가적 기밀사항이라나 뭐라나…
그러나 뚜껑을 따 보니 잔뜩 궁금증만 불러일으키던 장본인은 바로 ‘높은 양반’ 이었다. 몽골에서 귀국하던 날 임의동행 형식으로 끌려갔던 자리에서 처음 만난 그 사람, 명함을 달라고 하자 암행어사 마패 내밀듯 밀서 한 장을 내밀던 그 사람.
“그렇습니다. 이번 이벤트가 성공하면 우리 후보께서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게 되는데 어찌 이 일을 남에게 맡기겠습니까?”
“그렇지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유 회장님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랍니다. 기필코 성공시켜서 이 땅에 참된 대의를 꽃피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봅시다.”
“잘… 알겠습니다.”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뭔가 허전할 뿐이었다. 공양미 300 석을 장사꾼들에게 선뜻 내준 심청이의 마음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심청이는 아버지 눈을 뜨게 하려는 희망이라도 지녔으나 지금 유민 회장에게는 아무런 낙도 없었다. “약속대로 런런런 SPC 주식회사가 만들어졌으니 이제 유 회장님의 신변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워졌습니다. 구속될 걱정도 사라졌고 세무관계에 따르는 모든 잡음도 사라진 겁니다. 그러니 마음 푹 놓으시고 사업에만 전념하세요.”
이른바 면죄부가 발부되는 순간이었다. 아기가 새로 태어났을 때처럼 새로운 호적이 만들어졌으니 앞으로 붉은 줄긋지 말고 성실하게 사업에 임하라는 배려이며 또한 무언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1년 내에 나머지 2500억 원을 마련해야 할 일이 꿈만 같습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사업도 원활하지 않고…”
“우리도 그 점에 대해서 논의한 바 있습니다. 유 회장님이 자금압박에서 벗어나려면 몇 몇 대기업으로부터 협찬을 받아야 할 겁니다. 그 부분을 우리가 도와드리려는 겁니다. 우선 거성자동차에 10% 정도 부담해 달라는 요청을 해놓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거성에서는 이번 이벤트를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업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겠답니다. 10% 정도 협찬하는 것으로 끝내자는 말이겠지요. 10%를 협찬하는 대신 우리 측 랠리 출전 차량을 모두 거성자동차로 준비해달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높은 양반은 슬슬 지나가는 투로 대답했지만 엄연히 사업 총괄책임자로서 결정한 일을 통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젠가 유민 회장은 아들 호성에게 거성자동차로 랠리에 출전해야 할 것이라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그날 호성은 죽으려고 환장했느냐고 되물었던가?
“좋습니다. 이왕이면 국산 차로 달려보는 것도 좋겠지요. 10% 정도의 협찬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고무적입니다. 그래도 왠지 섭섭해요. 회사가 거덜 날 각오로 덤비는데… 저에게도 조그마한 보상이 따르면 좋겠습니다.”
“무슨 보상을 원하십니까? 각본대로 우리가 대권을 잡게 된다면 까짓 거…”
“여의도에 자리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선거에 나설 자신은 없고, 비례대표로 확실하게 진출할 수 있도록 빠른 순서로 부탁드립니다.”
비로소 유민 회장은 숨겨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펼쳐 보인 셈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