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적과의 동침 (26) 글 채희문/그림 유현숙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소설가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이라고들 하는데, 노년에 집필한 그의 소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아흔 살 노인이 생일을 맞아 열 네 살짜리 숫처녀와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심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하의 음악을 사랑하며 신문에 칼럼을 집필하기도 했던 아흔 살의 주인공 남자는 책과 음악에 몰입했던 기나긴 자신의 삶을 침대 위에서 축하하기로 결심한다. 그것도 아직 귓가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열 네 살짜리 어린 소녀와 함께…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열 네 살짜리 소녀가 육체적인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둘은 같은 침대 위에 누워있으면서도 섹스와는 상관없는 비현실적인 관계에만 머무는데, 노인은 그 소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해 한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오로지 바라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들처럼 여자 앞에서 사나이의 본때를 보여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하수들도 제발 평생에 한 번쯤 이런 차원 높은 사랑에 빠져볼 수 있게 되길… 유민 그룹의 황태자 유호성은 이미 화류계의 정신연령이 아흔 살에 이를 정도로 노숙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의 정신연령은 아직 철부지였으나 유독 화류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뜻이다. 그런 유호성을 화류계의 정신연령 유아기에 불과한 강유리가 꼬이러 나가는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간단하지. 뇌쇄적인 관능미로 한 방에 제압하면 내 포로가 되고 말거야.’

유리는 자신 만만했다. 까짓, 사내 녀석 꼬이는 일쯤이야 어린아이 팔목 비틀기 아니겠는가. 하물며 대비마마 신희영의 특사 자격으로 황태자를 꼬일 수 있게 되었으니 부채질 하는 놈에게 선풍기를 안겨 준 것과 뭐가 다르랴.

유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유호성을 만나기 위해 와인 바로 향했다. 관능미를 빼버리면 수염만 남을 것이란 자신감으로 충만했으니 걸음걸이도 당당했다.

“정식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지요? 반가워요.”

그녀가 유호성의 맞은편에 앉으며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오늘의 관능 포인트를 옴폭 들어간 쇄골로 표현하려 한 까닭이었다. 목덜미가 희게 드러나면서 스모키 화장을 한 쇄골 부위가 에로틱하게 떠올랐다. 아울러 싱그러운 향수냄새…

원래 여자의 목덜미는 남자들의 본능을 자극하는 출입문이라고 한다. 그 하얗고 부드러운 목덜미를 보는 순간 남자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눈길은 보다 은밀한 부위를 향해 파고든다는 말이다. 표정은 아무리 근엄하더라도 본능적 감각은 보다 직접적인 욕망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아도 확연히 드러나는 형이하학적인 세계. 섹스를 탐미하는 끈적끈적한 느낌…

유호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와인만 홀짝이는 중이었다. 유리도 한동안 침묵하며 와인을 마셨다. 그러면서도 가급적 유호성과 의도적으로 눈을 마주치곤 했다. 그녀는 호성과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듯 축축하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연기를 훌륭히 소화해내곤 했다. 어수룩한 사내들은 그 눈빛에 마비되면 즉시 입술을 내밀며 달려들곤 했다. 그 누구였든가? 내면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그 눈빛이야말로 입술을 부르는 갈망의 손짓이라고 했던 시인은.

“어머, 이걸 어째, 와인이 흘렀어요.”

유리의 하얀 목덜미를 따라 핏빛처럼 붉은 와인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유리는 재빠르게 옷깃을 앞으로 당겨 블라우스 앞섶의 단추 두개를 풀어내더니, 가슴골을 따라 흐르는 와인을 두 손가락으로 막아냈다. 다분히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런, 마구 흐르네.”

그 순간 유호성이 두 손을 뻗어 그녀의 가슴골을 타고 흐르는 와인을 막으려 한 것은 어쩌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뿔싸! 잘잘못을 깨닫기도 전에 벌써 그의 손바닥은 유리의 가슴팍에 포개져 있었다. 화류계 정신연령이 아흔 살에 달하는 유호성이 화류계의 숫처녀라 할 수 있는 유리에게 포획당하는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그녀의 젖가슴을 손바닥으로 받쳐 든 꼴이 된 유호성은 당황했다.

게다가 이걸 어째… 유리가 그의 손을 낚아채더니 손가락 틈으로 번지는 와인을 찬찬히 핥아먹기 시작하는 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