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FM ‘행복한 하루’ 실버 DJ, 인생ㆍ방송을 말하다
마포구청 ‘노인 일자리사업’ 일환
매주 화요일 오전 6시 전파
주부들 정겨운 입담에 미소 절로
방송 준비하며 자기관리도 철저
사전녹음도 이젠 한번에 오케이
활기찬 ‘제2의 인생’은 생방송中
“여기는 ‘행복한 하루’. 활기찬 화요일 시작합니다.”
매주 화요일 오전 6시. 서울 마포구의 새벽을 깨우는 마포FM ‘행복한 하루’ 홍영란(64) DJ의 목소리가 100.7㎒를 통해 흘러나온다. 이어지는 음악은 신 나는 트로트. 지상파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처럼 달콤하진 않지만 밝고 건강한 목소리에서 청취자들은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에너지를 얻는다.
소출력 라디오방송인 마포FM의 한 시간짜리 방송 ‘행복한 하루’는 60세가 넘은 어르신들이 진행하는 프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개팀으로 구성됐으며, 홍 씨는 올해 72세인 박길자 씨와 호흡을 맞춰 화요일 방송을 진행한다.
방송 내용은 새해계획 등 소소한 일상부터 지역 소식, 재활용물품 기부방법 등 생활에 도움이 되는 뉴스까지 다양하다. 방송 권역은 마포구와 서대문구 일부 지역으로 제한되지만 마포FM 홈페이지에서 다시듣기도 가능하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집밖에는 모르는 전업주부였을 뿐, 방송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홍 씨와 박 씨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방송을 시작했다. 마포FM 방송 DJ는 마포구청이 지역단체들과 연계해 실시하는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들은 2009년 7월 2주간 방송 실습교육을 거쳐 마이크를 잡았다.
“가정주부로 콱 박혀 살면서 운동이나 하고 즐겁게 쇼핑이나 하다가 갑자기 방송을 하려니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처음에 막막했어요. 하지만 살아온 세월이 길다 보니 얘기를 시작하면 많이 나오더라고요. ‘방송이라는 게 경험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편하게 말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방송하다 보니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박길자)
“결혼 전엔 직장에 다녔지만 당시에는 결혼하면 다 퇴직해야 했죠. 집에서 살림만 하다 보니 ‘나’는 없었어요. 애들이 다 크고 시간 여유가 생기니까 나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우연히 방송을 하게 돼 굉장히 즐겁고 행복해요.”(홍영란)
가정주부라 남들 앞에 서서 얘기해본 일이 거의 없는 이들은 처음 마이크를 잡았을 때는 손이 덜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 방송 첫날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봉사활동가 한 명이 게스트로 나왔는데 박 씨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게스트 얼굴을 보지 못하고 대본을 뚫어져라 보면서 그대로 읽어내려 갔다. 대본과 한 글자라도 다르게 말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그 후 2년간 내공이 쌓이면서 이제는 시집갈 때 사준 비싼 장롱을 이사하면서 친구에게 줘버린 야속한 딸 이야기 등을 술술 풀어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도 방송은 미리 녹음을 한다. 전문방송인도 아니고, 나이 때문에 순발력이 떨어지기도 해서다. 처음에는 NG가 많이 나 녹음을 마치는 데 두 시간씩 걸렸지만, 이제는 한 번에 OK다.
항상 방송 녹음시간 10~20분 전에 미리 와서 준비한다는 홍 씨는 “아무리 아마추어래도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며 “방송 내용이 (전문방송처럼) 알차지는 않더라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비록 라디오라 청취자들에게 모습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녹음하러 올 때 화장도 하고 옷도 신경 써서 입다 보니 이들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70대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인 박 씨도 “집에만 있으면 가꾸지도 않잖아요. 우리는 매일 나가니까 화장하고 옷도 갖춰 입게 되고, 그러니 더 젊어 보이겠죠”라고 말했다.
희수(稀壽)를 넘긴 박 씨는 평소 방송 녹음이 없는 날에는 탁구 등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한다. 영어, 일어 공부에도 매진하고 있다. 박 씨는 “요즘 여행 영어회화 공부를 하다 보니 운동할 시간이 줄어서 배가 나온다”고 걱정할 정도다. 그런 박 씨에게 홍 씨는 “뒤에서 보면 40대 몸매인데요”라며 웃었다.
건강관리, 외모 가꾸기뿐만 아니라 방송 소재를 찾기 위해 은행에 가서도 멍하니 순번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잡지나 신문을 뒤적이며 좋은 글은 메모해두는 등 시간관리, 자기관리에 철저해진 것도 방송을 통해 얻은 자산이다.
이들은 은퇴했거나 은퇴 이후를 걱정하는 다른 노년층도 교통정리처럼 단순한 일이나 손자ㆍ손녀 돌보기 등 외에도 자기계발을 할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고령화 시대가 와서 이제 100살까지 산다는데 할 일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면 퇴보할 뿐이죠. 고스톱이나 치고…. 그런 사람들이 활동할 기회가 마련됐으면 좋겠어요.”(홍영란)
“우리도 방송 안 했으면 집안에 들어앉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즐길거리, 일할거리가 많지 않으니까요. 노인들이 무료하지 않게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줘야 해요.”(박길자)
비록 연봉은 140만원에 불과하지만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는 두 사람.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많아 방심은 금물.
방송일을 언제까지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이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하고 싶어요. 78세에 방송하시는 분도 계시는 걸요”이라고 말했다. 신수정 기자/ssj@
사진=김명섭 기자/msi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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