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량 탄신 460주년 기념 세미나 고흥서 열려

1
조선 무관 신여량 장군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종합토론회가 29일 오후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박대성 기자.

[헤럴드경제(고흥)=박대성 기자] 임진왜란 승전의 숨은 주역인 신여량 장군 탄신 460주년 기념 세미나가 29일 오후 고흥 분청문화박물관 2층 대강당에서 학계와 관련 공무원, 문중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전라도 흥양현(현 고흥군)에서 태어난 조선무관 봉헌(鳳軒)공 신여량(申汝樑.1564~?) 장군 탄신 460주년을 맞아 장군의 업적을 알아보는 학술대회는 고령신씨(高靈申氏) 전남동부·고흥총회(회장 신판식) 주최·주관으로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과 함께 활약한 신여량 장군의 정신을 되새기고 당시 활동상을 알아보는 자리로 마련됐다.

학술대회는 신현식 고령신씨 전남동부고흥종회사무장의 사회로 공영민 고흥군수의 축사와 류제동 군의회 의장, 송형곤·신민호 도의원, 송시종 고흥문화원장, 월파 서민호선생기념사업회 송원하 회장 등이 참석했다.

주제발표에 앞서 축하공연으로 순천에서 온 우리춤연구소 김연우 대표가 진도북춤을 비롯해 화선무(花扇舞)를 선보여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1
29일 고흥에서 열린 신여량 장군 학술 세미나에 앞서 우리춤연구소 김연우 대표가 진도북춤을 선보이고 있다. /박대성 기자.

공영민 군수는 축사에서 “용역 결과, 경상도 한산대첩 승리의 주역이자 전사자의 무려 80%가 흥양현(현 고흥군) 수군으로 밝혀졌다”며 “용역과 학술대회 등을 통해서 흥양현 사람들이 ‘임란’을 극복하는데 어느 정도 주역이었는지 알아보는 중요한 시간이고 앞으로 선양사업의 중요성을 절감한다”고 행사를 축하했다.

김희태 전 전남문화유산 전문위원의 사회로 시작된 주제발표에서 이수경 지역유산연구원장은 ‘주사선연도(舟師宣宴圖)’ 그림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주사’는 수군을 의미하고, 선연(宣宴)은 ‘잔치를 베풀다’를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1564년 태어난 신여량 장군의 사망연도에 대해서는 1606년까지의 활약상이 확인되지만 이후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사망연도(졸년)는 알 수 없는 생몰미상 상태라고 했다.

이수경 원장은 “청철릭 홍철릭을 입은 주사별시에 합격한 15명을 기념하고자 남긴 그림인 ‘주사선연도’는 1603년 주사 합격자들을 모아 놓고 어사가 주도해 주사들에게 호궤하며 임금이 상을 내린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며 “좌목 15명의 인물은 주사별시에 관련된 경상우수영 및 전라우수영 시관 및 참시관들로 시행한 후 합격자들을 위한 잔치를 그린 그림으로 유일하다는 희소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주사선연도에 관직, 성명, 생년자, 본관, 거주지가 나타나는데 총 15명의 좌목에 흥양(고흥) 출신 인물이 신여량 장군을 비롯해 송덕일, 송득운까지 3명이나 있을 정도로 흥양수군이 맹활약했다”고 덧붙였다.

이 원장은 끝으로 “신여량은 4대 이시언, 5대 류형, 6대 이경준 통제사의 휘하에서 1601년부터 1604년까지 약 3년 간 경상우수영에서 활동했음을 관찰기록인 주사선연도와 당포전양승첩도(唐浦前洋勝捷圖) 등에서 살필 수 있다”며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 정려(旌閭)를 세워 그의 행적을 기리고 있는데 이러한 시도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난중잡록(亂中雜錄)과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의 사료적 가치를 검토하는데 있어서 당대의 기록과 비교 검토해야 함과 동시에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
29일 열린 신여량 장군 학술세미나 행사장에 당포해전 영인본이 전시돼 있다.

다음 발표자로 나선 이상훈 전 육군박물관 부관장은 ‘당포전양승첩도를 통해 본 당포해전과 신여량’이란 발표에서 “당포승첩도는 함평노씨본과 고령신씨본이 남아 있는데 노씨본은 유형문화재이지만 신씨본은 1600년 이후 도립된 물결(파도)무늬와 안료 등이 이후 근대적 그림 기법이 사용돼 왔다는 이유로 지정 해제됐지만 이 승첩도는 역사적 사실을 그린 그림이자 전법이 나와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그림으로, 임금의 하사품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의 통영에 해당되는 당포해전(唐浦海戰)은 1592년(선조 25년) 7월 10일(음력 6월 2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 수군함대가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해전이다.

이상훈 부관장은 “당포 앞바다 승첩도를 보면, 조선 수군의 전법을 알 수 있는데, 왜선 한 척에 대장선을 제외한 조선수군 5척이 에워싸는 전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당포승첩도는 400년 전 역사적 사실을 극적으로 설명해주는 기록화로서 원본격인 노씨본은 당시 회화사는 물론이고 조선수군의 전략전술 구사, 조선 수군이 승선하고 있었던 400년 전의 선박 연구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끝맺었다.

제3주제는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신여량 교서와 유서의 내용과 가치’에 대해 발표했다.

‘교서’와 ‘밀부’는 보물로 지정된 신여량 장군의 상가교서(賞加敎書)와 밀부유서(密符諭書)를 일컫는다.

상가교서는 공이 있는 관원을 포상하거나 품계를 올려줄 때 임금이 발급하는 문서로 조선중기 무장 신여량도 이순신 장군과 같은 교서를 받았다는데 의미가 크다.

전 교수는 “포털 검색사이트를 보면, 신여량 장군이 1564년에 태어나 1593년 30살에 사망한 것으로 나왔는데 여러 교서와 족보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606년까지 생존했으며 이 교서 등을 직접 받았다”며 “교서와 유서를 통해 잘못 알려진 생몰년을 바로 잡고 그의 전공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만력(萬歷) 32년(선조 1604, 선조 37년) 7월 17일 신여량에게 발급한 한자교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경상우도수군우후 신여량은 왜적과 힘써 싸워 이와 같이 사로잡거나 베어 죽이는 일이 있었으므로 상을 더해주는 교서를 내린다’고 적시돼 있다.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신여량에게 내린 유서에도 ‘경에게 일방을 맡기니 체임(體任)이 가볍지 않다.(중략) 혹 나와 경이 독단적으로 처치해야 할 일이 있을까 염려되는데 이때는 밀부가 아니면 시행치 마라. 또 뜻하지 않은 간모(姦謀)를 미리 방지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일 평상시와 다른 명령이 있거든 밀부를 합치해서 조금도 의심이 없는 연후에 마땅히 명령을 따르라. 그러한 까닭으로 내가 어압(御押)한 제17부의 밀부를 주니 경은 이를 받으라는 뜻으로 유서를 내린다’고 적혀 있다.

전 교수는 “신여량의 교서와 유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공적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발급 시기가 매우 오래됐기때문에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종합토론에는 김희태 전문위원의 사회로 김대현 전 현충사관리소장과 이효종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사, 신금식 고령신씨고흥군종친회장, 제장명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이수경 지역유산연구소장, 이상훈 육군박물관 부관장,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참여했다.

이수경 지역유산연구소장은 “신여량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참전한 것 같지는 않고 당시 육전에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1595년 진주판관에 임명되고 1597년부터 쭉쭉 해전에 참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제장명 교수는 “신여량 행적 의문점으로는, 행주산성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나 한산도대첩을 지휘했고 이때 공로로 부산첨사가 됐다고 언급됐는데 이 자료가 여러가지 오류들이 있다”며 “일제강점기 보완된거라 오류가 다수 보이는데 바로 잡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효종 진주박물관 학예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의 전과도 중요하지만, 전쟁 이후 수군 강국으로 등장한 일본(왜군)에 어떻게 반응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한다”고 제언했다.

전경목 명예교수는 “유서형식에 따르지 않은 방식이 많았을 것이다. 유서 대부분이 가문에 있기때문에 완벽하게 수집, 정리되지 않은 면이 있다”면서 “고문서를 배우려는 학생이 없는 현실이 안타까우며 한국사도 중요하지만 지역사를 배워 피부에 와닿는 역사를 배웠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신금식 고령신씨고흥군종친회장은 “오늘 토론에서 신여량 장군이 거북선 승선기록이 없다, 벽파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다, 진주판관에서 파직됐다는 등의 발표가 그동안 제가 알았던 사실과 달라 당혹스럽다”면서도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 봉헌공(신여량) 선조님의 그 기록이 다시 한 번 바로 잡아줬으면 하는 생각이며 신여량 장군 유물이 광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는데 우리 고흥에도 박물관이 있으니까 고흥에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종친회장은 더불어 “신여량 장군이 거북선 승선기록이 없다고 했는데 당시 조선에 거북선이 몇 대나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답변에 나선 제장명 이순신연구소장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은 초기 3척 정도, 1595년에 5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이후 선조가 거북선을 더 만들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7척 내외로 추정되지만 칠천량해전에서 다 없어지고, 이후 광해군 때 다시 거북선 만들기를 시작해 가장 많이 건조됐을 때가 정조 때 40척이 정점이고 1895년 전근대시기 거북선이 다 사라졌다”고 답변했다.

이날 토론회는 1시부터 시작돼 5시 30분까지 진행됐지만 신씨 종친회 문중 대다수가 자리를 지키고 질문이 쇄도하는 등 높은 관심도를 보여 종합토론에 참여한 전문가들조차 “여러 학술세미나를 다녀 봤어도 이렇게 높은 관심을 보이는데가 없었다”며 매우 높게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