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황혜진 기자]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수십조원의 충당금 폭탄 부담으로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면서 조선ㆍ해운 등 이른바 취약업종의 돈줄이 마르고 있다.
급기야 국내 조선업체가 수주에 성공해도 은행들이 선수금환급보증(RG)를 거부해 수주 취소 위기에 내몰리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영업이나 재정여건이 좋은 조선사들까지 자금 흐름이 막혀 쩔쩔매는 상황도 속출하고 있다. 7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은 최근 해외 수주에 성공해 2척의 선박을 건조하기로 했지만 채권은행들로부터 RG발급을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KEB하나은행이 주채권은행인 현대중공업 채권단은 수차례 회의를 진행했지만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다. RG발급을 정해진 시한 안에 하지 못하면 수주는 취소될 수 있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중소조선사들이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체결한 이후 RG 발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빅3’도 이전에 비해 깐깐해진 RG 발급 기준에 난감해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NH농협은행이 조선사에 대한 RG한도를 3조원가량 줄인데 이어 다른 시중은행들도 동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농협은행은 올해 연말까지 현대계열 조선사(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와 삼성중공업의 RG 한도를 각각 2조원, 1조원씩 줄일 예정이다.
RG란 선주가 주문한 선박을 제대로 인도받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은행 등 금융기관이 서는 보증이다.
선주는 조선사에 선박을 주문하면서 선수금을 지급한다.
이때 조선사가 파산 등의 이유로 선박 건조를 완료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 금융기관이 대신 선수금을 돌려주겠다고 보증하는 것이다.
STX조선의 법정관리로 채권단이 RG에서만 1조2000억원 정도가 물린 것으로 알려지면서 당분간 조선사들은 RG발급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구조조정발 부작용은 조선ㆍ해운업 이외의 업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조선ㆍ 해운업 구조조정에 따른 충당금 부담으로 은행들이 리스크관리에 집중하면서 대기업에 이어 중소기업까지 은행권 대출이 어려워지고 있다.
대기업 대출은 극감했고, 지난해 은행 간 대출 경쟁이 치열했던 중소기업 대출도 신중모드로 돌아섰다.
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자는 “전체적인 기업 신용등급이 하락하면서 리스크관리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담보가 없는 신용대출을 줄이고, 대출한도를 보수적으로 책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기준이 강화되다보니 만기연장이 불가한 경우도 있다”면서 “금융당국이 구조조정 상황을 체크하고 있는 만큼 업체들 상황을 일일히 봐주긴 사실상 어렵다”고 털어놨다
이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시중은행들은 올해 1분기 말 대기업여신 비중을 줄줄이 낮췄다.
신한은행의 총 대출금액(원화기준)을 전분기대비 2조원(0.9%)가량 늘렸지만 대기업 대출은 1230억원(0.6%) 줄였다.
KEB하나은행은 원화대출금 중 대기업대출 비중을 3개월만에 0.55%포인트나 줄였다. 같은 기간 우리ㆍKB국민은행도 각각 0.3%포인트, 0.09%포인트 낮췄다.
대기업보단 상황이 낫지만 중소기업 대출도 위축되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월 중소기업 대출은 전월대비 3조 2000억원 증가에 그쳐 증가폭이 지난해 동기대비 절반 수준으로 극감했다.
시중은행의 한 리스크 담당자는 “지난해부터 대출 연장 시 금리를 추가로 올려받거나 대출 한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며 “내부에서도 상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은행들은 선제적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대출 가산금리를 올리는 방식으로 대출 수요 조정에 나서고 있다.
은행연합회 공시자료에 따르면 시중은행들의 중기대출에서 올해 1분기 보증서 담보대출 금리를 지난해 4분기 대비 0.03~0.15%포인트가량 올랐다.
기준금리가 다소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산금리를 더 올리는 방식으로 리스크에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들이 기업 대출 자체를 꺼리면서 기업들이 제2금융권이나 사채시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말 대기업의 상호저축은행 대출금이 1조원을 넘어섰다.
2년새(2013년말→2015년 말) 46.4%(3522억원)나 늘었다.
저축은행 기업대출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3년 3.9%에서 2015년 5.2%로 상승했다.
보험사도 기업들로 북적이긴 마찬가지다.
생명보험사의 기업대출 증가율은 20%에 육박하는 실정이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은 사채시장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경우 신용도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사채쪽을 찾게 된다”면서 “금리가 높지만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신상철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활한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업을 살리는 금융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우수 기술이나 아이디어로 성장할 수 있는 기업의 담보력 부족을 보완할 수 있도록 보증기관의 역할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