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태열 기자]고등학교 2학년 아들과 중학교 3학년 딸을 둔 대구에 사는 윤 모(48) 씨 부부는 오래 전부터 주말을 맞아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려 계획했던 일정을 바꿔 안산의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나들이를 가기위해 소요되는 비용 대신 안산을 방문해 조의금으로 내고 근처에서 간단하게 식사나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아이들도 흔쾌히 동의했다”며“이번 사건을 계기로 서로 드러내놓고 말은 안하지만 그동안 일과 공부 때문에 서로 무관심했던 가족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고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세월호의 비극은 사건 발생 12일째를 맞고 있지만 아직 생사조차 모르는 인명만 120여명이 넘는다. 연일 언론에 소개되는 절절한 사연들은 일상에 매몰돼 살던 소시민들의 생각과 마음가짐도 바꿔놓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홍진표 교수는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로 점점 개인주의화가 돼가지만 세월호 참사로 가족간의 끈끈한 정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고있다”고 했다.
세 자녀를 둔 주부 박모(45) 씨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며 “예전에는 공부 좀 열심히 하라며 다그치고 조그만 일에도 야단도 많이 쳤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더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는 아버지들의 마음도 변화시키고 있다. 중견건설업체에서 일하는 박모(45) 차장은 “늘 일에 치여 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3~4번은 술자리를 가졌지만 이젠 가능하면 집에 일찍 들어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려 한다”며 “그동안 아이들에게 사춘기 이후 자녀에게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랑한다’는 표현도 많이 해줄 생각”이라고 했다.
고등학생 2학년생 오빠를 둔 중학교 3학년생인 김모(15) 양은 이번 사고를 접한 후 “두 살 터울인 오빠와 사춘기이후 말도 거의 안하고 지냈는데 이젠 ‘하나뿐인 내 오빠’라는 생각 때문에 앞으로 오빠에게 상냥하게 잘 대해줄 것”이라며 “엄마, 아빠에게도 좀 더 잘하고 친구들과도 더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다.
학생들과 가장 최일선에서 생활하는 교사들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엄하고 무뚝뚝하기로 소문난 모 중학교 이모(48) 교사는 아침마다 등교하는 아이들을 한명씩 꼭 안아준다. “아이들에게 그동안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엄하게 대했는 데 이제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있어 행복하고 고맙다”는 말도 자주 해줄 것”이라며 했다.
이번 참사는 무리한 과적운항, 선박 자체의 결함 등도 사고의 원인이지만 사고 이후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 선장과 선원들의 도덕불감증, 이후 사고 수습에 쩔쩔매는 무기력한 정부의 모습 등에 분노와 함께 “과연 이 나라를 믿고 계속 살아야하나?”라는 좌절감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아무도 못 믿을 대한민국에 사느니 차라리 이민을 떠나겠다는 가시 돋친 푸념이 터져 나올 정도다. 시민 이모(52) 씨는 “말로는 OECD에 가입한 선진국이니, 세계10대 무역대국이니, 반도체 등이 세계최고이니 하면서 후진국에서도 나오지 않을법한 이런 사고를 보고 있자니 정말 진진하게 이민도 고려하고 싶어질 정도”라고 했다.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주변 상황에 감사하거나 분노하는 것은 슬픔을 이겨내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만 안타까운 건 우리 사회가 꼭 대형참사가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라며 “공생에서 존재의 가치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과 채정호 교수는 “이번같은 충격적 사건은 사고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계속적인 언론보도 등을 접하면서 잠재돼 있던 우울한 감정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며 “극도의 심리적 불안함으로 일생생활로의 복귀가 힘들거나 무기력함을 느낀다면 적극적으로 심리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