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사실관계 모호 등 들어 부인

아베 내각은 2007년 각의결정한 국회 답변서를 비롯해 꾸준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군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내각의 입장이다. 아베 정권이 구 일본군 위안부가 정부 주도 하에 강제로 연행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에는 4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산케이신문의 1993년 한일 위안부 청취보고서 공개 사건이다 . 지난 2013년 10월 16일 산케이는 “입수한 보고서에는 증언의 사실관계가 모호하고 다른 기회에 발언과 내용이 불일치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성명뿐만 아니라 생년월일도 부정확한 예도 있고, 역사자료로서 통용될 수 없는 내용이었다”고 청취보고서의 타당성을 부인했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이 공개하지 않기로 한 내용이 공개된 것이기도 해 일본 내에서 큰 파장을 불러왔다. 극우 세력은 산케이가 공개한 청취보고서를 근거로 “위안부의 거짓말은 증거효력을 잃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역사학자들에 의한 학술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며 “정부와 여당도 검증작업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아사히 신문의 ‘요시다 세이지 허위증언’ 보도 사건이다. 고(故) 요시다 세이지는 1982년 아사히 신문 인터뷰 기사를 통해 “일본군이 제주도에서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연행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1977년 자신의 저서 ‘조선 위안부와 일본인’을 통해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적으로 동원했으며, 일본 정부가 이를 고의적으로 묵인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 증언이 모두 허위로 드러났다는 것. 1983년 요시다 증언을 16회에 걸쳐 기획기사를 보도한 아사히 신문은 2014년 8월 5일 요시다 증언이 허위라고 판단하고 모든 기사를 취소했다. 인터뷰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배경에는 일본의 전후 역사인식이 있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학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는 ▷전후 미국과 일본의 동맹화 ▷전후 아시아 국가의 국민국가 형성 때문에 일본의 ‘침략자’이자 ‘가해자’로서의 자각이 불충분하게 됐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전후처리가 이뤄진 과정에서 아시아 피해국가들은 독립과 개발독재형 군사정권이 탄생했다. 이 때, 각 아시아 국가의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경제 원조 획득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전시 인권문제는 다뤄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보수층 사이에서는 ‘이미 해결된 문제가 다시 부상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다카하시 교수는 적시한다.

네 번째는 ‘군과 관헌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한’ 위안부의 조직적 연행을 증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위안부 연구의 선구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학 교수는 “군과 관헌에 의한 협박을 동반한 조직적 연행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뒷받침할 (문서상)의 증거는 현재 나오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BC급 바티비아 재판 제 106호 사건’이라는 제목에 명시된 강제연행에 대한 증언도 일본 보수세력은 “일부 특정부대의 일탈” 혹은 “일부 장교에 의한 일탈”이라며 꼬리자르기에 나서고 있다.

일본 보수세력이 ‘꼬리 자르기’에 나서는 배경에는 육군성 병무과가 기안한 통첩문이 있다. 1938년 3월 4일 육군성 병무과가 기안해 중국 파견군 참모장 앞으로 보낸 공문서는 “군위안소 종업부 모집이 ‘유괴’와 비슷해 질서가 없다”며 “파견군에서 통제해 헌병과 경찰당국의 연계로 실시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요시미 교수는 이를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거로 제시했지만, 보수세력은 오히려 이를 “정부는 강제연행을 지시한 적이 없다”는 증거로 주장했다.

김성훈·문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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