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현대전의 중심엔 치열한 정보전이 있다. 정확한 위치파악, 이동첩보, 지도부의 차후 계획 등을 사전에 수집하고 행동을 예측해 대응방안을 마련하기까지 정보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림반도를 손에 넣기까지는 불과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푸틴의 속전속결이 가능했던 원인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의 정보력 부족과 대응 미숙이 일부 있었음을 지적했다.
WSJ은 미 정보당국의 한 고위 관료의 말을 인용해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을 노리고 있다는 “사전 경고가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만한 정보가 없었다”고 보도했다.
첩보위성 등 정보자산을 동원해 러시아 지도부와 군 지휘부가 논의하는 침공계획을 통신 감청 등을 통해 확보하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정세를 통해 사전 경고를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연계해 입증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이번 사태가 있기 몇 달 전부터 미 정보 당국은 백악관에 푸틴이 크림반도에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은 러시아 내 병력 이동에만 집중했고 정보당국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이미 크림반도 내에 있던 무장병력들이 활동을 개시했다. 정보당국은 발생 3일 전에 백악관에 이를 보고했고 오바마 행정부의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일부 군 관계자와 정보 당국자는 러시아가 미국의 정보 수집 기술에 대해 알고 있어 통신 수단을 변경하거나 도청이 어려운 장비를 사용해 미국이 사전에 계획을 알아차릴 수 없게 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게다가 중요한 정보 수집 자산 중 하나인 첩보위성은 냉전 이후 테러 대응에 집중해 중동과 아시아 지역에 전개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번 크림지역 사태와 관련, 제프리 피야트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는 2월 초부터 대사관 직원으로 팀을 꾸려 정보수집에 나섰다. 이들이 가져온 상세 내용은 단순한 스케치일 뿐이었으나 우려할 만한 것이었다고 WSJ는 전했다.
타타르계 인권운동 단체 등 현지 정보통은 이들에게 새로운 친러시아계 정치 그룹이 형성되고 있다고 전했었지만 당시 내부 보고서에서는 러시아의 침공계획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정부 시위가 폭력사태로 번졌던 18일에는 러시아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고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장악하기 나흘 전인 25일에는 러시아 국방부가 미국 측 연락관을 불러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인근 지역에서의 대규모 군사 훈련 계획에 대해서도 사전에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관계자들은 이것이 우크라이나 이동을 덮기 위한 것이고, 이는 2008년 러시아가 조지아에 개입하기 전에 사용했던 전략이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평가단은 훈련이란 단어에 따옴표까지 붙여 브리핑을 진행했고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비관론이 반영됐다. 우크라이나 인근에서 병력이 모이는 선명한 위성사진도 나왔다.
유럽사령부는 추가 위성 정찰을 요구했으나 아프가니스탄, 북한, 이란 등에 집중돼 있어 첩보 위성을 끌어올 수 없었다.
26일 브리핑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당국자들은 러시아군이 크림 지역 작전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단의 보고를 받고 작전이 개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미 정보당국은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푸틴 대통령과 지도부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었고 한 관계자는 “누군가 ‘이렇게 합시다’라고 말한 것도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WSJ은 전했다.
27일 피야트 대사는 크림 의회 건물에 러시아 국기가 걸려있는 사진을 워싱턴에 전송했으나 깃발을 걸은 이들이 러시아군인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지지세력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휴민트(인적정보 수집수단)의 부재도 있었다. 크림 지역에는 러시아군 움직임을 보고할 수 있는 미국인이 없었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무인항공기(드론)도 없었다. 소셜미디어와 위성사진에 의존했을 것이라는 것이 WSJ의 예상이었다.
28일이 되어서야 정보 당국은 정책결정자들에게 신원을 알 수 없는 무장세력이 러시아군일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도 러시아군이 크림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신뢰할만한 정보가 부족해 ‘확신한다’고 승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8일이 다 가서야 오바마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주권 침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할 수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국방부는 대부분의 정보를 키예프 대사관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받았고 전화로 내용이 오갔다. 이들 사이에 오간 문서들 중에는 러시아의 움직임이 상세하게 보고된 민감한 서류들도 있었다.
군 관계자들 역시 러시아군에 정보제공을 요청했으나 최소한의 정보만을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뜻밖의 일이라는 반응도 있었으나 이는 전형적인 위장전술의 하나로 해석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