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배두헌 기자] 제 이름은 돼지저금통이예요. 혹시 저를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거 같은데요.
사람들이 요즘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아요. 왜냐구요? 슬프지만, 별로 필요가 없어졌데요.
저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문방구에 한묶음씩 걸려있어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하곤 했었죠.
각 집에 저 하나쯤은 모두 갖고 있었구요, 저보다 덩치가 작은 돼지 녀석부터 헤비급 돼지 형님까지 여러 모습으로 사랑을 받았답니다. 어린 고객들은 설날 받은 세뱃돈을 고사리 손으로 꼬깃꼬깃 접어 제 등에 나 있는 작은 홈 사이로 집어넣었죠.
그러고선 뿌듯해 하는데 저까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수시로 와선 주머니에 있는 동전도 넣고 가는데 떨어질 때 제 안에 쌓여있는 동전과 부딪혀 나는 ‘쨍그랑’ 소리가 참 경쾌했답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제 배는 채워져갔는데, 이는 곧 제 배가 갈라질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인이었죠.
제가 동전을 더 이상 넣을 수 없을 만큼 육중해지면 사람들은 저를 책상 위에 눕혀 커터칼로 배를 죽 가릅니다.
이로써 제 임무를 다하고 버려지게 돼지만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기뻤습니다.
저는 기부와 선행의 아이콘이기도 했습니다.
2000년엔 전북 전주의 한 이름없는 초등학생이 60만원 가량이 든 저를 동사무소에 놓고 사라졌는데요, 그 이후로 15년째 이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도 어김없이 현금 뭉치와 돈이 들어 있는 저를 놓고 갔는데요, 지금까지 이렇게 해서 기부된 돈이 4억원에 달한다고 하네요.
한국 사람들에게 돼지란 부(富)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또 저의 유래에 대해선 다른 설도 있는데, 미국 캔자스 주의 한 소년이 한센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돼지를 키운 것에서 시작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pygg’라는 점토로 돈을 담는 그릇을 만들던 것이 발음이 유사한 ‘piggy bank’, 돼지저금통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요.
하지만 이제는 소비가 환영받고 저축, 절약의 미덕은 예전만 못한 시대가 되면서 저축의 상징인 저는 찬밥 신세가 됐습니다.
신용카드 소액결제가 늘어나며 동전 사용이 크게 줄어든 것도 이유라고 하네요.
심지어 동전 제작단가도 높아지면서 동전 유통을 가로막는 주범으로 몰리는 수모도 겪고 있습니다.
동전이 가득한 저는 은행에선 환영 받지 못하는 손님입니다.
그런데 제 친구인 종이통장도 같은 신세가 될 것 같습니다.
한장 한장 넘겨가며 계좌에 저축한 돈을 확인하던 종이통장은 오는 2017년 9월부터 발행이 중단된다고 하네요.
인터넷·모바일뱅킹 확산으로 통장 필요성이 크게 줄었다는 판단에서랍니다.
1897년 국내 첫 상업은행인 한성은행이 생긴 이래 사용된 종이 통장은 120년만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은행에 가면 차곡차곡 통장을 정리한 뒤 뿌듯해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전자금융시스템의 발달로 사실 이미 종이통장도 저와 같은 처지가 된지 오래입니다.
badhoney@heraldcorp.com
※돼지저금통을 의인화한 관점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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