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서지혜 기자]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엔씨소프트 사옥 지하2층에는 직원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이 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역시 게임회사의 도서관답게 대다수의 도서는 전문서적이 가득하지만 좀 더 깊숙히 들어가자 고대미술 사진이 있는 책에서 동양의 고대 역사를 담은 서적까지 도무지 게임과는 관련이 없어보이는 책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런 책은 누가 보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관계자는 “장구한 스토리가 있는 게임의 경우 배경에 활용되기 때문에 이런 지식이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아하, 게임제작에서도 다름아닌 ‘취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사실 기자가 지난 1년여 간 게임 및 콘텐츠 기업을 출입하면서 놀란 점 중 하나는 제작자들의 기자 못지 않은 취재력이었습니다. 웹툰 ‘마음의 소리’로 유명한 스타작가 조석 씨는 절대 자동차를 타지 않는다고 합니다. ‘생활툰’이라는 작품의 특성상 일상생활의 다양한 모습을 포착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걸어다니며 주변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요즘 흥행 중인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주요 배경이 되는 마을도 사실 작가가 발로 뛰어다니며 찾아낸 실제 서울에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바일 게임 ‘아이러브커피’는 취재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이 게임 속에는 실제로 커피를 만들 때 이용되는 원두가 레벨상승을 위한 미션에 총망라돼 있고, 게임 속 커피 원두 중 하나인 ‘과테말라안티구아’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가상공간이 아닌 실제로) 12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미션이 섬세합니다. 개발자의 취재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미션입니다. 이런 꼼꼼한 취재력 덕분에 ‘아이러브커피’는 수개월 째 매출 1위를 기록했습니다.

내년에 출시될 ‘월드오브워십’이라는 게임이 아쉬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영국의 게임업체 워게이밍이 개발한 월드오브워십은 2차세계대전 참전국들이 항공모함과 잠수함 등으로 해전을 벌이는 온라인 게임입니다. 최근 이 게임의 홍보동영상에 등장한 ‘욱일승천기’가 문제가 되면서 국내 게임 카페의 4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은 이를 삭제해달라는 서명운동에 나섰습니다. 결국 홍보 동영상에서는 욱일승천기가 삭제됐지만 해당 업체에서 “욱일승천기가 나치독일의 전범기인 하켄크로이츠처럼 국제재판소에서 위법 판정을 받지 않아 삭제할 수 없다”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 논란은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이 업체는 실제로 전작 ‘월드오브탱크’에 하켄크로이츠로 논란이 일자 독일 탱크 깃발을 독일 국기로 교체한 바 있습니다.

욱일승천기가 실제로 일본 해군의 깃발이고, 월드오브워십이 2차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만든 게임인만큼 다행히 이 게임 개발자의 ‘취재’가 ‘오보’는 아닙니다. 하지만 국내 게이머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해당 게임사의 ‘취재력’입니다. 욱일승천기는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식민지 피해 국가들에게 아픈 과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기술적인 팩트 찾기는 성공했을지언정 한국, 중국 등 민족주의적 성향이 비교적 강한 피해국가의 영업전략에서는 큰 실패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의 국민들이 2차대전과 관련한 역사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불매운동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을 추가로 취재했더라면 이런 실수는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취지야 어찌됐든 워게이밍 측에서 월드오브워십을 ‘스타크래프트’나 ‘리그오브레전드’와 같은 대박 게임 반열에 올리고 싶다면 동아시아 지역에서만이라도 욱일승천기를 삭제하고 출시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현지화’는 수출의 기본이라는 점도 해외영업을 시작하기 전 꼭 미리 공부하길 바랍니다.

서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