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실적평가에 한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등상은 캐딜락 엘도라도(고급자동차)입니다. 2등상도 알고 싶으신가요? 스테이크 나이프 세트입니다. 3등상은? 해고입니다.”
부동산 중개회사의 영업사원들을 주인공으로 한 미국 영화 ‘글렌게리, 글렌 로스’(1992년)에서 본사 파견 직원 블레이크(알렉 볼드윈 분)가 지사의 실적 부진 사원들에게 위압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영업의 세계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만 있다. 과정은 필요없고 오로지 결과로만 말하는 비정한 세계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이름을 묻는 지사 직원의 질문에 “‘엿먹으라구’(f**k you), 왜냐고? 당신은 오늘밤 현대차를 타고 왔지만, 나는 8만달러짜리 BMW를 몰고 왔네. 그게 내 이름이야!”라고 조롱한다. 두고 두고 회자되는 ‘세일즈맨의 경구’도 남겼다.
“철칙(ABC)이 뭔 줄 아나? ‘항상 계약만 존재할 뿐’(Always Be Closing)이라는 것.”
“커피를 내려놓게. 커피는 오로지 계약 도장을 받은 자들의 몫이지.(coffee’s for closers only.)
호텔방에 모인 세일맨들의 하룻밤의 대화와 이야기를 그린 케빈 스페이시, 데니 드 비토 주연의 영화 ‘빅 카우나’에서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네가 예수를 팔든 부처를 팔든 시민권을 팔든, 아니면 ‘부동산으로 돈버는 법’을 팔든 중요하지 않지. 네가 파는 상품이 너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진 않아. 무엇을 팔든 넌 그냥 ‘영맨’(영업사원, marketing rep)일 뿐이야. 누군가와 인간 대 인간으로 진심으로 대화하고 싶다면 상대의 아들딸에 대해 물어보게. 그의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네. 그런데 단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네가 대화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다면, 이미 그것은 대화가 아니네, ‘영업’이지. 그리고 넌 인간이기를 그치고 ‘영맨’이 되는 거지.”
미국 월스트리트 주식중개사를 배경으로 고객들에게 투자를 유치하는 브로커의 이야기를 그린 ‘보일러룸’에서 직원 중 한명인 짐 영은 자신의 고객 설득 노하우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바닥에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아주 중요한 문구가 있어. ‘~처럼 행동’(as if) 법칙이지. 너도 배워야 할 때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를 들면) 네가 이 회사의 빌어먹을 사장인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 네가 최고의 정력을 가진 남자인 것처럼 행동하라는 거야!”
할리우드 영화 속 세일즈맨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항상 “이 회사에서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처음 있는 일”인 듯(영화 ‘파고’) 고객에게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중산층의 도덕이란 개에게나 줘라”(‘글랜게리, 글렌 로스’)라고 이야기하는 ‘냉혈한’이자 ‘사기꾼’으로 흔히 묘사된다. ‘인간’과 ‘영맨’사이에서의 고뇌와 회의, 절망도 자주 그려진다. 그 중에서도 ‘을’의 설움이 가장 큰 분야 중 하나가 제약회사 영업사원이다.
영화 ‘러브 앤 드럭스’는 병원을 상대로 ‘비아그라’를 비롯한 약품을 파는 제약회사 영업사원과 파킨슨씨 병에 걸린 여인과의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특히 다른 로맨틱 코미디와 달리 의사를 상대로 한 영업사원의 로비를 고리로 한 병원과 제약회사간의 노골적인 뒷거래를 리얼하게 그려냈다. 여기서 남자주인공은 창구 여직원에게 ‘추파’를 날리거나 동침까지 서슴지 않으며 영업에 열을 올린다.
한국영화로는 ‘연가시’에서 김명민이 맡은 주인공이 그랬다. 역시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의사들의 골프 접대는 물론이고, 휴일에 의사들의 자녀까지 놀이공원에 데려가는 등 굴욕적인 ‘을’로서의 직분을 해야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아부의 달인’에서 보험왕을 꿈꾸는 주인공은 아부의 달인으로부터 “아침에 나올 때 거울을 보고 자존심은 냉장고에 넣어둬라. 버리지는 말고. 뇌를 툭, 놔버려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래도, 영화 속 세일즈맨들은 오늘도 ‘클로징’을 위해 또 전화를 걸고, 영업을 나선다. 가방 속엔 계약서를 챙겨넣고. 조폭도 아니고 형사도 아니고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리도 없는 그들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이유는 상품과 자존심을 팔고 사랑과 생존, 가족의 행복을 사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을’들의 대변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