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
‘람보’의 실베스터 스탤론 ‘코만도’의 아널드 슈워제네거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 … 냉전시대 스크린속 영웅들 대부분 환갑 넘은 나이에도 원숙미 넘치는 현역으로 활동
김지운 감독의 영화 ‘라스트 스탠드’에서 초반부에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휴일 맞은 보안관으로 반바지 차림에 보트 슈즈를 끌고 마을 주민들과 시덥잖은 수작을 하는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모습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랬듯 최전선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고 돌아온 노병의 권태와 피로감이 얼굴에 깊이 잡힌 주름과 함께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극중 아널드가 노안 때문에 안경을 끼고 서류를 들여다보는 모습은 차라리 신선하다.
극중 누군가가 “영감이 몸은 좋은데, 젊었을 때 운동 좀 하셨수?”라고 묻거나(아널드 슈워제네거는 잘 알려진 것처럼 보디빌딩 세계챔피언 출신이다), 총격전 와중에 엎어진 그를 보고 놀란 주민이 “괜찮수?”라고 질문하자 아널드가 “이젠 너무 늙었수다”(too old)라고 응대하는 등 ‘돌아온 액션 노병’을 기리는 농담이 심심치 않게 재미를 준다.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66세다.
마초와 터프가이, 액션영웅들의 전성시대, 미남 영화배우 출신 레이건이 성조기 펄럭이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던 냉전시대, 1970~80년대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던 이들.
‘람보’의 실베스터 스탤론, ‘코만도’의 아널드 슈워제네거,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 ‘델타 포스’의 척 노리스 등 강인한 육체와 폭발적인 화력을 과시하며 무력시위를 하던 ‘전설’들이 속속 스크린에 귀환하고 있다.
이들보다 선배로선 1950~60년대의 ‘카우보이’, 1970년대 ‘더티 하리’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다. 레이거노믹스의 시대, 스크린에서 범죄와 싸우고 테러리스트와 대결했던 이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열성 공화당원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지금은 대부분 환갑이 넘고 할아버지가 됐지만 여전히 ‘현역’이라는 사실이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우정출연한 영화 ‘익스펜더블2’엔 마치 동창회를 하듯 ‘올드보이’들이 등장해 신나는 난장을 벌였다. 67세의 실베스터 스탤론을 필두로 73세의 척 노리스, 58세의 브루스 윌리스가 장 클로드 반담(53), 리롄체(50), 제이슨 스태덤(46) 등 ‘젊은’ 후배들과 호흡을 맞췄다.
이들이 서로에게 한두 마디씩 던지는 농지거리가 가관이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총을 빌려달라고 하자, 한소리 듣는다. “고장 내면 용광로에 처넣겠어!” ‘터미네이터’는 용광로에 빠져죽었다. “킹 코브라에 물려 죽었다는 소문이 있던데?”라는 질문을 듣자 척 노리스는 “물론, 고열에 시달리다 죽었지. 킹 코브라가”라고 대답한다.
미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척 노리스 유머 시리즈’의 패러디다. 척 노리스 시리즈는 우리로 치자면 최민수 시리즈나 최불암 시리즈였다.
‘익스펜더블2’에서 각 주인공의 과거 흥행작과 대사들이 무수하게 패러디되고 인용돼 웃음을 준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말한다. “우리도 구식이지.” “역시 구식이 좋아.”
브루스 윌리스는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로 벌써 5번째 시리즈 영화를 찍었다. 1988년 1편 개봉 당시 브루스 윌리스는 33세였다. 5편에서 주인공 존 매클레인은 아들까지 대동해 테러리스트와 맞서 싸우지만, 대단한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알량하다.
‘라스트 스탠드’의 원숙함이나 기품 있는 농담도, ‘익스펜더블2’의 자기 패러디도 없기 때문이다. 극중 존 매클레인이 총을 잡으며 “뭐냐”고 묻자 아들은 “구식 화기예요. 아버지처럼. 안 그런가요?”라고 대꾸한다. 존 매클레인은 “맞다”고 대답한다. 역사 없는 ‘구식’은 ‘현대식’ 속에서 그저 지루함과 안타까움만 줄 뿐이다.
‘다이하드5’에서의 주인공은 전편에서 보여준 ‘무용담’을 불러오지 못하고 그저 의미 없는 총격과 폭파만 거듭한다. 전설적인 무용담에 대한 회고와 반성이 없으니 재미도 없다.
돌아온 액션영웅들 중에서 요샛말로 ‘갑’(최고)이 있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이미 자신이 감독ㆍ주연한 서부극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자신이 구축했던 카우보이와 액션영웅의 이미지를 해체함으로써 폭력의 의미를 성찰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과 닮은 올드 머슬카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인 ‘그란 토리노’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등에서 과거의 폭력이나 전설적인 무용담을 반추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기성세대의 헌신적인 ‘퇴장’을 보여주며 감동을 준다.
할리우드의 액션 전선엔 ‘퇴역’은 없다. 다만 귀환을 기다리는 ‘예비역’이 있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