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이나 계약직이나 힘든 건 매한가지야 회사는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 결국 똑같은 부속품이지 다만 부속품도 급이 있을 뿐
KBS 월화극 ‘직장의 신’은 고용과 노동이라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매회 초반에 ‘IMF 이후 16년,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 시대에 이제 한국인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된 시대’라는 내레이션이 깔린다. ‘Y-Jang’이라는 식품회사의 정규직인 장규직 팀장(오지호)과 3개월 계약직인 정주리(정유미)만 보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실상과 문제점, 애환이 리얼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끌고 가면 드라마가 한없이 무거워져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슈퍼갑 계약직’ 미스김(김혜수)을 등장시켜 과장되고 코믹한 행동으로 코미디물로 만들었다. 일본 드라마 ‘파견의 품격’보다 훨씬 더 코믹해졌다.
현실에서 계약직은 절대 ‘갑(甲)’의 위치에 설 수 없다. 하지만 미스김은 직장 내에서의 모든 사적인 번거로운 인간관계를 거부한 채 자발적인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간다. 무려 124개의 자격증을 지니고 웬만한 회사 업무는 못하는 게 없다. 9시 출근, 6시 칼퇴근을 지키며 시간외근무, 심지어 회식에서 고기를 자르고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치는 것에 대해서도 시간외수당을 챙긴다. 3개월이 끝나면 계약을 연장해 달라고 하지 않고 외국으로 휴가를 떠난다. 이쯤 되면 미스김은 모든 회사원이 진정으로 바라는 ‘로망’이 아닌가.
미스김은 사사건건 장규직과 부딪힌다. 장규직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며 정년 30년짜리만이 ‘친구’라고 말한다. 심지어 3개월 있으면 안 볼 사람과 뭐하러 사이 좋게 지내냐고 한다. 장규직 팀장과 같은 부류인 황갑득 부장(김응수)은 계약직 직원의 이름도 모른다. 미스김은 탁월한 업무로 장규직을 제압하며 시청자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미스김이 장규직에게 “내가 필요할 때 써먹고 가차없이 버리는 당신 같은 ‘회사멍멍이’를 한두 번 봤는 줄 아느냐”라고 말했을 때 후련하고 통쾌해진다.
정규직으로 들어오라는 황 부장의 제의를 뿌리친 미스김은 정규직을 ‘노예’로 규정한다. 그리고는 가장 약한 존재인 정주리를 돕는다. 그냥 돕는 게 아니라, “항상 정규직 타령만 하고 있지, 계약직으로 사는 것에 대한 자존심이 없잖아” 하고 비정규직 정주리를 단련시킨다.
하지만 정규직이나 계약직이나 힘든 건 매한가지.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은 이 상황을 더욱 심화시킨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비정규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힘들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상황은 ‘88만원 세대’를 대변하는 계약직 정주리의 입을 빌려 매회 한 번씩 되뇐다. “누구나 한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級)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조직에서 살아남은 자도 비인간적인 삶을 감내해야 한다. 장규직 팀장의 예에서 보듯이, 거래업체의 부당한 요구에도 꼼짝 못하고 회식에서는 먹기 싫은 폭탄주를 계속 마신다.
미스김이 회사라는 조직의 비정함이 안겨준 개인적인 상처를 감추고 있는 건 ‘정규직도 별 볼일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과거 정규직으로 일했던 은행에서 정리해고 당하고 회사는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 트라우마로 자신의 얼굴을 철저히 숨긴 것이다. 그래서 정규직과 계약직, 양쪽의 장점만을 취한 ‘슈퍼갑 계약직’의 출현은 직장인에게 묘한 판타지를 안겨준다.
미스김과 장규직이 회사에서 대립하고 갈등하면서도 묘한 동지애를 느끼고, 이는 사랑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인다. 장규직은 체육대회에서 미스김에게 씨름을 져준다. 만약 이겼다면 임신한 계약직 여직원 박봉희의 계약연장이 무산될 수 있다. 결국 미스김과 장규직의 관계를 통해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리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질타와 희망을 주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대립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 같다.
서병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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