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영화 ‘은교’(감독 김지우)를 통해 70대 노인 이적요로 파격 변신, 모두를 놀라게 했던 박해일. 그가 ‘고령화가족’(감독 송해성)을 통해 가진 것 하나 없지만 오만한 감독 40대 인모로 돌아왔다. 스크린 속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변신의 귀재’는 바로 박해일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 말수가 적듯 연기를 함에 있어서도 거품이 없다. 담백하고 진솔한 그의 연기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캐릭터 별 분석 능력도 뛰어나다. 한 없이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발산하다가도 돌연 찌질해진다.
‘콩가루 집안’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 ‘고령화가족’에서 박해일은 한 없이 ‘찌질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의 날 선 연기는 배꼽을 잡게 하고, 동시에 눈물샘을 훔치기도 한다. 약 1년여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박해일을 최근 광화문 근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찰진 욕설, 그리고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하자’ 사람들”
‘고령화가족’은 가족 영화다. 멜로, 액션 등 장르를 불문하고 열연을 펼친 박해일이지만 그에게 가족영화는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박해일은 오히려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일이고, 흔히 볼 수 있는 ‘하자’ 캐릭터라 연기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옹기조기 모인 가족들과 재밌게 촬영했어요. 시너지가 있어야 재밌는 영화인데, 정말 활기가 넘쳤죠. 욕이 자주 등장해서 마치 하나의 대사 같잖아요. 굉장히 리얼하면서도 찰지지 않나요?(웃음) 이런 부분도 감독님, 배우들과 상의하면서 촬영했죠. 하나 하나 머리를 맞대고 함께 했어요.”
가장 큰 숙제는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인모를 어떻게 공감 있게 표현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번 캐릭터에 접근함에 있어 유연해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인모라는 캐릭터가 인생자체가 안 풀리는 사람이잖아요. 최악의 상황에서 점점 추락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너무 현실성이 없으면 안 되니까, 그런 지점들 역시 놓치지 않으려고 했죠. 내면의 감정들을 일단 후반부까지 갖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굉장한 숙제였어요.”
# “내 가족들 떠올리며 연기했다”
흥행 참패 감독 인모. 가엾고 안쓰러운 인물이다. 그런 그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은 친구도, 제작자도 아니다. 가족밖에 없다.
“제가 연출을 해본 건 아니지만 항상 작업할 때 감독님들과 함께하잖아요. 거드름 피우는 제작자를 만나는 장면이나, 에필로그, 촬영 현장들이 참 현실적이었죠. 실제로 제가 본 것들도 있고요.”
영화를 촬영하며 때때로 가족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고.
“제 가족의 느낌을 생각해보기도 했죠. 그때 그때 생각나는 재밌는 기억들도 떠올려보고요. 어머니에 대한 잔상도요. 인모가 어머니에 대해 오해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하면서 폭발하는 신이요. 저 역시 어머니한테 저런 적이 있었나 되돌아 보게 되더라고요.”
인모의 캐릭터는 한 없이 이기적이기도 하다. 과거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형 한모(윤제문 분)를 무시하고 가족을 업신여기기도 한다.
“그런 인모의 모습이 저한테는 묘미였어요. 형한테 완전히 주눅 들어 살면 재미없을 것 같았죠. 또 인모의 그런 무모한 당당함이 있어야 후반부 가족들의 관계가 알려질 때 더 효과적일 것 같았죠. 어느 가정마다 다 사연이 있잖아요. 가족 개개인들도 개인사가 있고요. 서로 얘기를 나누지 않는 고민이나 비밀이 훨씬 많잖아요.”
매번 티격태격하는 인모와 한모. 그래도 이들이 형제임이 자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목욕탕 신이다. 박해일은 윤제문과 함께 촬영한 이 신이 참 즐거웠다고 했다.
“상황 자체가 재밌는 장면이잖아요. 막상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있었죠. 보이지 말아야 하는 부분들은 다 ‘공사’를 했어요. (윤)제문이 형도 워낙 재밌는 분이라서 즐겁게 촬영했죠. 남자들끼리.(웃음)”
‘고령화가족’은 박해일에게 가족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송해성 감독님이 배우에게 기대도 좋은 영화라고 하셨잖아요. 그 말씀처럼 저 역시 윤여정 선생님을 비롯 제문이 형, 효진이에게 기대면서 촬영했어요. 워낙 또 개성이 강하신 분들이라 긴장도 하긴 했지만요. 그래도 편안하게 촬영할 수 있는 장면들이 꽤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가족’이라는 단어는 꽤 흥미로워요. 뭔가 가족 영화라하면 굉장히 애착이 생기더라고요. 멜로물 속 연인과의 관계와 달리 가족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다보니 좀 더 여유롭고 편해져요.”
# “항상 일관될 수 없는 연기..아직도 어마어마한 과제”
스크린을 통해 꾸준히 관객과 만나지만, 브라운관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굳이 드라마 출연을 안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드라마라는 장르는 모든 연령대가 시청하잖아요. 배우가 보여줘야 하는 부분이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역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매체다보니 연기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을 바로바로 볼 수 있다는 거죠. 뭐 TV나 스크린이나 매력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싫다 좋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드라마는 제가 할 수 있는 톤이 아닌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영화 쪽에 더 맞지 않나 싶습니다.”
생활 연기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배우 또한 아니다. 티켓파워가 있는 ‘믿고 보는 배우’지만 좀처럼 박해일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를 찾기가 힘들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웃음) 뭐 작품마다 제가 취해야 할 행동과 연기가 다르잖아요. 항상 일관될 수 없죠. 저는 그저 캐릭터대로, 작품대로 맞춰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역할마다 변화를 요구하는 지점이 있다 보니 매번 숙제고요. 그래도 결과물을 볼 때마다 뿌듯하기도 하죠. 일상적인 연기를 많이 해서 그런지 큰 감정을 지니고 가는 장르 속 캐릭터의 감정들은 많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양지원 이슈팀기자 /jwon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