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링’
지상으로부터 높이 1m, 로프 네 가닥으로 에워싸인 25㎡의 사각지대. 그곳은 링이다. 스승이 묻는다.
“주먹 다쳤냐? 왜 그렇게 못 때리냐? 다칠까봐? (내가)묻잖아!”
제자의 입은 궁색하다. 답할 말이 없다. 스승의 채근은 이어진다.
“네가 안 다치는 게 낫냐, 내가 안 다치는 게 낫냐?”
“둘 다요.”
“둘 다 안 다치는 거? 링에서? 내가 네 스승이냐? 아냐! 나는 적이라고 너를 가르쳤다. 복싱은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다.”
절뚝거리면서도 얼굴을 내놓고 주먹을 받는 스승과 눈물을 흘리면서도 펀치에 힘을 싣는 제자. 스승에게 복싱은 링뿐 아니라 인생 역시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라는 잔인한 진리를 가르쳐줬는지도 모른다. 박현성(45). 고교 시절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며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선발전 결승에 올라갔던 복서. 하지만 석연치 않은 판정패로 두 번 모두 좌절하고 스파링 파트너일 뿐인 2인자의 패배감을 맛봐야 했다. 이후 링을 떠나 폭력조직에 가담해 전과자의 꼬리를 달았고, 불운한 삶을 비관해 분신자살을 시도,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27차례의 수술 끝에 마흔의 나이로 이종격투기 선수로 재기했고, 복싱클럽을 인수해 지도자가 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링’(감독 이진혁)은 자신의 못다 한 꿈을 후배를 통해 이루려는 박현성 관장과 그의 인생사를 듣고 찾아온 20대 후반 여성 복서 박주영을 비롯한 제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사제의 3년간,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겼다.
박현성 관장의 제자 중 스물 여덟의 적지 않은 나이에 처음 링에 오른 박주영(30)은 명문대 연구소에서 재직했고, 청소년ㆍ가족폭력 상담사 등 수많은 자격증을 보유한 커리어 우먼이다. 복싱 입문 당시에도 7급 공무원 시험에 최종면접만을 앞두고 있었으나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글러브를 꼈다. 박주영은 입문 7개월 만에 전국 대회 2위에 입상하는 등 빠른 성장 속도로 복싱계를 놀라게 했고, 2011년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그가 2012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 도전하기까지 카메라는 사제를 둘러싼 링 안팎의 일상과 훈련을 따라간다.
영화는 일부러 눈물을 쥐어짜지 않는다. 가족의 이야기도 없고, 억지스러운 과거의 복기도 없다. 글러브를 끼고 상대를 맞는다는 것,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연습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 라운드가 끝나면 올라가는 손은 하나뿐이라는 것, 바로 ‘복싱’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한다.
제자 박주영은 책에서 읽었다며 ‘상상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경구를 스승에게 전해준다. 2012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을 끝으로 제자들을 떠나보내고 스스로도 링에서 내려온 박현성 관장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과거에 대한 상상을 많이 했다. 너희들이 내 과거를 바꿔줄 줄 알았다. 나는 올림픽 선발전에서 2등 했다는 과거를 붙잡고 멈춰버린 시간을 보냈다. 너희들만큼은 링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찾아 대가가 되길 바란다.”
결국, 사각의 링은 스승과 제자 모두에게 힐링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링’은 언제나 삶에 대한 멋진 비유가 돼 왔고, 다큐멘터리 ‘링’ 역시 복싱을 통해 도전과 승부, 실패와 재기가 반복되는 우리 인생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대단한 드라마도 없지만, 늘 작은 승부의 연속인 우리네 삶을 닮은 영화라고 할까. 25일 개봉했다.
이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