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권남근 기자]지난달 말 삼성증권은 경기도에 있는 한 중소기업으로부터 은퇴 준비 강연을 요청받았다. 이날 강연에 나선 강연자는 깜짝 놀랐다. 참석한 200여명의 직원 평균 연령대가 30대 초반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8시부터 2시간 넘게 진행됐는데 참석자들의 열기가 높았다. 강연자였던 한정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은퇴 후 필요 자산 준비를 중심으로 하는 50대 대상의 강의와 달리 생애 전반에서의 자산 축적방법은 물론 가족관계, 경력 관리 등 비재무적 준비까지 이야기 폭이 넓었다”고 말했다.

‘100세 시대’는 이제 흔한 말이 됐다. 하지만 100세 직장은 없다. 길어야 60세까지다. 30년 남짓 벌어 남은 40년을 써야 한다. 직장인 대부분이 맞을 ‘인생 2막’이다. 하지만 ‘삶의 질’은 언제부터,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은퇴 준비는 50대 직장인의 고민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미처 준비조차 못한 상황에서 퇴직한 이도 많다. 무턱대고 뛰어든 ‘창업’으로 퇴직금마저 날려버린 경우도 주위에 흔하다. 한국투자증권이 국세청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50대 자영업자의 사업 실패율은 47%에 달한다. 700만명에 이르는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대부분 그랬다.

베이비붐 세대의 막내도 이제 50세가 됐다. 곧 은퇴를 맞을 나이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은퇴’는 공포에 가깝다. 개인은 물론 가정과 사회 전체에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최근 30~40대에서 은퇴 준비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달라진 은퇴 준비 트렌드다. 예전만 해도 30ㆍ40세대에게 은퇴는 먼 훗날의 일이었다. 이젠 단순히 은퇴를 떠나 자산 축적을 시작으로 생애 설계 전체를 미리 계획하는 이들이 많다. 이직도 잦다. 젊은 직장인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일찍 준비할수록 더욱 행복한 노후를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워지는 분위기다.

한정 연구위원은 “요즘은 30세 전후에 취직해 40대에 1차 퇴직하는 이들이 많아 소득 기간이 길지 않다”며 “재취업을 위한 경력 관리는 물론 국민연금ㆍ퇴직연금에 개인연금까지 가입해 노후 소득대체율을 70%까지 올려놔야 한다”고 말했다.

은퇴 설계는 재무 설계가 기본이다. 부동산이 있다고, 펀드에 들었다고 안도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망 이전에 은퇴 자산이 고갈되는 것을 ‘은퇴 파산’이라고 부른다. ‘내가 남느냐, 돈이 남느냐’의 문제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 따르면 은퇴 자산이 2억원이 있을 경우 은행 정기예금(연 3.73%)에 넣어두고, 60세부터 매년 800만원씩(이듬해는 물가상승률 4%씩 반영) 쓴다고 가정할 때 84세에 모두 소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가상승률이 1%포인트만 올라도 81세로 소진 기간이 당겨진다. 김혜령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지금 30~40대는 90~100세에 맞춘 은퇴 플랜이 필요하다”며 “5년만 일찍 준비해도 복리 효과를 감안하면 준비 부담이 크게 줄어들고 은퇴 자산은 크게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특히 연령대별로 차근차근 준비해 은퇴 이후 들어갈 비용을 파악하고, 이에 맞춰 자산 구성을 맞춰놓아야 한다. 아울러 은퇴 이후엔 보다 체계적인 자산 관리가 중요하다. 한국의 실제 퇴직 연령은 53세다. 2016년부터 정년이 60세로 연장되지만 실제 퇴직 연령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투자증권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통상 은퇴 후 200만~300만원 수준(은퇴 전 60~70%)의 은퇴생활비가 필요한데 국민연금ㆍ퇴직연금에 동시에 가입해도 평균 노후 소득은 월 96만원에 그친다. 특히 은퇴 후 연금 수령 전까지의 소득 공백기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다. 은퇴 후 재취업이나 새로운 직업을 갖기 위한 경력 관리도 중요하다.

이제 ‘은퇴=퇴직’이라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직장을 떠났어도 직업은 이어갈 수 있다. 전문직이 유리할 수 있지만 일반 직장인도 종사했던 분야에서 전문성을 살려 재취업하거나 창업할 수 있다. 재취업에 성공할 경우 ‘인적 자산’의 가치는 크게 높아진다. 3000만원의 연봉을 받는다면 이자 3%의 1년 정기예금에 약 10억원을 넣어둔 것과 같다.

건강ㆍ친구ㆍ취미ㆍ봉사ㆍ부부 및 자녀와의 관계 등 비경제적 부분에서의 준비도 중요하다. 일반 직장인 외에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나 자영업자 등에도 해당된다. 비경제적 부문을 놓치면 반쪽짜리 은퇴 준비에 불과하다. 은퇴 이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삶의 균형’이 더 중요하다. 한 발 앞선 은퇴 준비가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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