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오른팔을 잃은 한 일본 병사는 가족의 품으로 귀환했지만, 더 이상 정상적인 성관계가 불가능하다. 변태적이고 가학적인 성행위를 통해서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사는 강간과 폭행, 살해 등 성범죄를 연쇄적으로 저지른다. 결국 경찰에 잡힌 그는 심문에서 항변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전쟁 중에 배운 것이라며 천황이 허락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은 전시가 아니라는 형사의 말에 “중국에서는 양민을 죽였다”고 대꾸한다. 그는 ‘전쟁을 일으킨 것은 천황인데 왜 우리가 죗값을 치러야 하느냐, 도조 히데키는 A급 전범인데 왜 천황은 아니냐”고 묻는다. 일본 영화 ‘전쟁과 한 여자’(감독 이노우에 준이치) 속 한 장면이다. 일본이 일본에게 묻는 전쟁범죄의 책임이다. 직접적이고 통렬하다.

일본의 ‘양심’이 일본과 아시아에 반성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또 다른 노력도 있었다. 지난 2005년 10월, 일군의 일본 그림책 작가들이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사죄와 피해배상이 없음을 부끄러워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를 시발로 ‘한ㆍ중ㆍ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가 출범했다.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12권의 그림책을 3국의 작가들이 펴내는 기획이었다.

12명의 작가 중 한 명인 한국의 권윤덕은 위안부를 소재로 한 ‘꽃할머니’를 만들기로 한다. 하지만 ‘국가 성폭력’의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작가 및 한국 출판사와 ‘불행한 경험을 극복하고 희망과 힘을 획득한 한 여성의 아름다운 삶’을 담아내자는 일본측의 입장은 달랐다.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된 모든 그림책들이 3국에서 출간됐으나, 권윤덕 작가의 ‘꽃할머니’는 현재까지 일본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싶은 것’(감독 권효)은 권윤덕 작가를 중심으로 ‘한ㆍ중ㆍ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의 작업과 논의, 완성과정을 그렸다. 3국간 역사인식과 ‘평화ㆍ공존‘에 대한 입장 차이 뿐 아니라 남성폭력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성차(性差)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관료 및 정치인들의 극우 발언 및 신사 참배가 이어지고 일본 사회의 우경화ㆍ군국주의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일본영화와 한국영화 2편이 15일 광복절을 맞아 나란히 개봉하게 됐다.

이 중 ‘전쟁과 한 여자’는 일본 고유의 성애영화(핑크무비) 장르를 빌어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 사회의 황폐한 그늘을 그렸다. 전 일본 문화부 문화부장인 테라와키 켄이 제작을 맡는 등 우경화를 우려하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의 참여와 지지로 이루어졌다. ‘전쟁과 한 여자’는 전쟁으로 절망과 허무함 속에 허덕였던 알콜 중독 작가와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젊은 매춘부, 전쟁의 상처에 시달리며 강간과 살인 행각을 벌여가는 상이 병사를 통해 전쟁이 파괴한 인간성을 드러냈다. 일본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일본의 전쟁책임론과 천황 비판을 직설적으로 담았다. 영화평론가 정지욱씨는 “일본에서도 우경화를 비판하는 양심적인 시민과 지식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일본에서는 금기시돼왔던 주제의식을 전면에 내걸면서 전쟁 가해자인 일본 스스로 자성의 목소리를 통해 세계 평화를 모색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평했다.

다큐멘터리 ‘그리고 싶은 것’은 전쟁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 가해국인 일본의 평화 및 공존을 향한 노력과 과거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전쟁과 한 여자’와는 장르도 소재도 다르지만, 아시아 3국을 둘러싼 현재진행형의 역사와 미완의 과제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한 가지인 셈이다.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