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나리오는 결코 한번에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을 들었다 내려놨다 했어요. (마음을 힘들게 하는 장면이 많아서) 도저히 한번에 볼 수가 없더군요. 찍으면서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촬영 매순간, 영화 단 한 컷에도 불손하지 않기 위해서 다짐을 거듭했습니다.”
‘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54)이 ‘소원’으로 돌아왔다. 지난 2010년 ‘평양성’ 이후 3년만이다. ‘소원’은 끔찍한 아동 성폭행 사건 후 피해 소녀와 가족의 치유기를 그린 영화다. 개봉(10월 2일)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이준익 감독에겐 끔찍한 상처를 안은 이들의 삶을 대중 매체와 장르를 통해 전해야 하는 ‘이야기꾼’의 윤리적 고민과 숙명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을 떠나는 순간부터 덧없이 곡해되고 허망하게 휘발되는 ‘말’(言)의 농간을 경계하려 애썼다. 촬영장에서 그는 배우와 스탭 그 누구에게조차 ‘흥행’과 관련된 어떤 단어도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했고, 스스로도 혹여 불경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정중하고 공손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연출의도에 대해 “힘겹게 시나리오를 읽고는 영화로 꼭 나와야된다고 생각했다”고만 말했다.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3.09.24 이준익 감독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3.09.24 이준익 감독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3.09.24
“보통 상업영화의 무기는 자극이죠. 할리우드영화는 시각적 자극에 바탕하고 있고, 많은 장르영화들이 내용과 관계의 자극을 담아냅니다. 흉악범죄를 다룰 때는 ‘부당한 것에 대한 철저한 복수와 응징’이라는 주제가 가장 극적인 자극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복수와 응징이 유일한 처방일까요? 그로부터 한 발 비껴서서 ‘다른 길’을 가보면 새로운 가치에 대한 시야가 열리지 않겠습니까? 이 영화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문’을 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소원’은 가해자 응징의 영화가 아니라 피해자의 치유에 관한 영화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한 국면을 풍미하고 있는 범죄영화나 스릴러는 대부분 흉악범죄자에 대한 처절한 응징과 처벌을 다루고 있다. 끔찍한 사건을 스크린에 노골적으로 ‘전시’했고, 기름부어진 객석의 분노는 공감, 그리고 흥행의 강력한 재료가 됐다. 스크린은 흉악범죄자를 가상적으로 처단함으로써, 그러지 못하는 현실의 무능력을 은폐했다. 반면, ‘소원’은 끔찍한 사건을 전시하지도 않고, 분노를 강요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다시 삶을 껴안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영화는 8살배기 소녀 ‘소원’(이레 분)과 아빠(설경구 분) 엄마(엄지원 분)가 거대한 슬픔과 상처를 감당해가는 아주 작은 이야기들을 고백하듯, 속삭이듯 들려준다. 주인공들 곁의 사람들은 이들이 무너지지 않게 하도록 같이 울어주고 껴안아주고 돈을 내주고 밥을 해준다. 그들 스스로도 ‘소원’의 회복을 통해 치유를 얻는다. 작품 올올이 슬픔이 배어 있지만, 눈물과 함께 툭, 툭, 웃음이 삐져나오고, 결국은 울음과 함께 행복한 미소를 짓는 결말로 간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무수히 듣고 만나고 생각했던 이 감독의 진심이 결결이 묻어나온다.
”이 영화에선 아무도 경쟁하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흉악범죄를 다룬 영화의 통속성을 벗어나 있죠. 영화를 하면서 누군가 탈무드를 인용해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라고 했던 말을 들었습니다. 결국 제 영화는 상처에 무릎을 꿇을 것인가, 상처를 이길 것인가를 다뤘죠.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상처를 이기는 방법이 아닐까요?”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3.09.24 이준익 감독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3.09.24 이준익 감독 인터뷰.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2013.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