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 송강호의 ‘관상’(감독 한재림) 꼬리칸의 탑승객들을 태우고 빙하기의 지구를 질주했던 ‘설국열차’의 엔진 후열이 아직 채 식지 않은 가운데, 곧이어 도착한 송강호의 차기작 ‘관상’은 그가 가진 ‘극적 설득력’이 여전히 한국영화계에선 독보적인 것임을 입증하는 작품이다. 2030년 빙하기의 지구에서 날아와 곧 1980년대 엄혹한 독재 치하의 법정으로 떠나갈 송강호의 추석 시계는 1452년의 조선에 맞춰져 있다. (송강호의 차기작은 1980년대 인권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12월 개봉 예정 ‘변호인’이다)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꿈이었던 평범한 사내는 어처구니 없이 당대 권력투쟁의 한 복판으로 휘말려 들어가, 비극을 맞는다. 영화 ‘관상’의 절정은 송강호의 피끓는 절규다. 울부짖다 목이 쉬고, 눈물마저 말라 피를 토해내듯 꺽꺽대는 한 사내, 그리고 한 아버지의 울음은, 송강호라는 배우의 힘을 증명한다.
‘관상’은 당대 최고의 ‘관상쟁이’로 꼽히는 가상의 인물과 조선 초기 정쟁의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계유정난’의 역사적 사실을 결합시킨 이른바 ‘팩션 사극’이다. 극중 역적 집안으로 몰려 아들 ‘진형’(이종석 분), 처남 ‘팽헌’(조정석 분)과 산골에 은거하던 천재적인 관상쟁이 ‘내경’(송강호 분)은 한양의 내로라 하는 기생 연홍(김혜수 분)의 꼬드김에 “집안을 일으키고자” 장안으로 올라왔다가 서릿발같은 조종 내 권력투쟁에 엮이게 된다. 병약해 죽을 기색이 역력한 문종은 왕위를 이을 어린 세자(단종)를 걱정해 “역모의 운명을 타고 난 자를 가려내고 김종서와 함께 보위를 지켜달라”는 비밀 지령을 내경에게 내린다. 이때부터 ‘호랑이 상’인 김종서(백윤식 분)와 피도 눈물도 없는 야망으로 가득찬 ‘이리 상’ 수양대군(이정재 분) 사이에서 내경의 두 눈과 세치 혀에 조선의 국운이 달린다. 김종서와 수양이 팽팽한 대결을 이룰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아들을 지켜려는 문종과, 그를 배신해야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아버지 내경, 조카(단종)를 죽이고 세상을 가지려는 삼촌 수양과 그를 도와야만 조카를 구할 수 있는 삼촌 팽헌이 댓구와 아이러니를 이루며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 영화 ‘관상’의 재미 중 하나는 두 아버지와 두 삼촌이 이루는 운명의 희비극이다. 각 인물을 오가며 균형과 대칭을 허물고 역사가 뒤바꿔놓은 인생사의 희로애락를 보여주는 인물이 송강호가 연기한 주인공이다.
‘설국열차’의 ‘남궁민수’도 그랬거니와 ‘관상’의 ‘내경’ 역시 송강호를 위한, 송강호가 아니었으면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대개 체제의 주변이나 바깥에 있는 인물이었다가 때로 떠밀려, 때로 무심코, 권력이나 사건의 중심부로 들어서면서 희극성과 비극성을 자아내는 인물이 된다. 보잘 것 없는 힘과 지능을 가진 이가, 국가마저 포기하거나 오판한 거대한 적을 상대로 홀로 싸우자고 나섰을 때 관객들은 우스꽝스럽고 측은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인물의 감정에 동화된다. ‘살인의 추억’이 그랬고, ‘괴물’이 그랬다. 약에 취해 정신 놓고 살던 ‘열쇠공’이 본의 아니게 반란의 최전선에 선다거나(‘설국열차’), 동네 사람들 머리나 깎아주던 이발사가 청와대로 불려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든가(‘효자동이발사’) 하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평범하거나 보잘 것 없는 사내가 모종의 거대한 흐름이나 사건에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희비극이 송강호에겐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다. 그 때마다 관객들은 기꺼이, 열광적으로 송강호가 구현하는 인물을 받아들였다. 보잘 것 없는 이의 사소한 인생사와 역사나 사회의 거대하고 특별한 사건이 부딪치고 맞물렸을 때, 권력이나 집단의 운명은 거창한 외피를 벗고 우스꽝스러운 본질을 드러내거나, 개인의 삶에 드리워진 본래의 비극적 속성이 베일을 벗는다. 거센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개인은 갈팡질팡하다 기력이 쇠해 결국 허탈한 웃음을 웃거나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도리밖에는 없다. ‘관상’에서 송강호는 몸이 약해 다리를 절지만 영특하기로는 누구 못지 않은 아들을 구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남겨진 문종의 유지를 거스를수도 없다. 일개 관상쟁이일 뿐인 내경은 당치도 않게 아들을 구하랴 종묘사직을 지키랴 역사의 대세를 따르랴 갈팡질팡하다 험한 꼴이란 험한 꼴은 다 보게 된다.
농담 던질 여유없이 질주했던 ‘설국열차’에서도 송강호가 가진 희극성은 ‘김밥에서 옆구리 터지듯’ 삐질삐질 새어 나온다. 송강호의 존재 자체가 앞만 보고 질주하는 ‘설국열차’의 제 3의 대안적인 노선을 상징했다. 봉준호 감독은 그것을 가리켜 ”김밥(열차)의 옆구리 터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영화에서도 전반부에선 송강호의 능청스러운 유머가 빛을 발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다양한 장르의 표정으로 육화하는 송강호 얼굴의 바탕엔 평범한 인생살이의 근본적인 소시민성이 깃들어 있고, 그래서 관객에겐 그의 얼굴 자체가 ‘극적인 설득력’이 된다. 돌이켜 보면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은 스크린의 전면을 차지한 ‘송강호의 얼굴’이었다. 얼굴의 상에 나타난 운명을 소재로 한 ’관상‘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그의 얼굴에서 관상전문가들은 무엇을 읽었을까?
“제가 ‘구렁이 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영화 티저 예고편의 자문을 맡았던 관상 전문가가 한 이야기입니다. 짝눈에 구렁이상은 남을 속이며 살 팔자인데, 마술사나 연기자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직업을 선택한 셈이죠.”
■ 설경구의 ‘스파이’
최근 설경구(45)는 영화 ‘스파이’(감독 이승준, 5일 개봉)의 무대 인사차 대구를 방문했다. 극장 직원이 마치 오랜 친구나 선배를 맞는 듯 반갑게 웃었다. 설경구에게도 직원의 낯이 설지 않았다. “너무 자주 뵙죠?” 설경구의 인사였다. ‘타워’로 지난해말, ‘감시자들’로 불과 한달여전에 같은 극장을 찾았으니 왠지 겸연쩍었던 설경구다. “아니에요, 자주 오세요”라는 직원의 화답에 설경구는 “그렇지 않아도 곧 또 올거에요”라며 웃었다. 오는 10월엔 또 다른 출연작인 이준익 감독의 ‘소원’이 개봉한다. 전에 없이 출연작 개봉이 몰려, 설경구는 올해만 4편으로 팬들을 만나게 된다. ‘스파이’의 개봉을 앞두고 만난 설경구는 “1년에 4편이라니 민망하다”고 말했지만, ‘타워’에 제법 관객이 들었고, ‘감시자들’은 크게 성공했으니 올해도 ‘기본’ 이상을 너끈히 해냈다. ‘설국열차’와 ‘관상’, 그리고 연말 개봉예정인 ‘변호인’까지 연이어 관객을 만나는 송강호 이상으로 설경구도 올 한해 수확이 벌써부터 풍년 예감이다. 각각 1000만명을 동원한 ‘실미도’와 ‘해운대’를 포함해 ‘5367만명을 동원한 배우’라고 친절하게 덧붙인 영화사의 집계가 아니라도, 설경구는 최근 전례없는 전성기를 맞은 한국영화에서도 타율도 좋고, 장타력도 좋은 ‘리딩 히터’임이 분명하다. 연기 경력 20여년, 공인된 ‘연기파’에 ‘흥행배우’인 그도 고민은 있다.
“세고 독한 연기, 진하고 강렬한 색깔의 캐릭터를 하게 되면 기존 작품에서 자기복제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난 작품들에서 주로 강하고 진한 이미지를 보여줬으니까요. 비슷한 색깔을 반복한다면 관객들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까요?색깔을 빼는 연기가 오히려 어려워요. 단역 시절까지 하면 20년 해왔는데 이제 어떨 때는 이제 꺼낼 카드가 없다고 느껴질 때도 있죠.”
그래서 힘을 빼고 색깔을 옅게 했다. 자신이 놀기 보다 후배(한효주)가 맘껏 뛸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았다. 그 영화가 전작 ‘감시자들’이었다. ‘스파이’에선 마음 비우고 몸을 풀고 액션과 코미디로 구르고 엎어졌다. ‘스파이’는 아내(문소리 분)도 모르게 국가 비밀 정보원으로 일하는 철수(설경구 분)의 좌충우돌 활약상을 담은 첩보 코미디영화다. 설경구는 조직에서 유능한 스파이이지만 아내에겐 ‘팔푼이’ 취급을 받으며 고양이 앞에 쥐 신세인 주인공 역할을 맡아 문소리와 ‘허당’에 ‘푼수’인 부부연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제법 심각한 분위기로 출발한다.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해적들에게 붙잡힌 한국인 선원들을 구해내려는 국정원 비밀 요원들의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베테랑인 설경구가 현금 든 서류 가방을 들고 해적 두목과 협상하기 위해 적진으로 들어선다. 설경구가 내레이션이 깔린다. ”협상의 첫째 원칙, 눈을 피하지 않는다. 둘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셋째, 어떤 요구를 들어도 일단 ‘노’라고 하지 않는다. 넷째, 안되면 몸으로 해결한다.”
진지한 어조로 협상의 원칙을 읊고 있는 가운데, 해적 두목과의 거래가 성사될 무렵, ‘삐리리’ 울리는 휴대폰. 액정에는 ‘마누라’라고 찍혀있다.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표정 하나 흔들림 없던 그이지만, 휴대폰을 받아들고서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남편이 생사를 넘나드는 작전 중인 것을 꿈에도 상상 못한 아내, “또 어디 PC방에 처박혀 있는 것이 아니냐”며 성화다. 그렇게 우여곡절, 좌충우돌 끝에 인질 구출작전을 소화하고 집에 온 철수. 장손인 그가 아내와 해결해야 될 임무는 받아 놓은 날에 아이를 갖는 것이다. 아내의 구박에 “협상 첫째 원칙은…” 운운하지만, 적에게나 통하지 천적인 아내에게는 무소용. 돌아오는 것은 아내의 매운 손이다. 아내의 불같은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예고없는 외박과 특근을 밥먹듯이 하던 중, 철수는 테러 사건 첩보를 입수해 태국으로 파견된다. 북한 핵무기와 관련된 테러리스트의 준동과, 남한에 망명을 기도한 북한 고위 인사의 딸(한예리 분) 납치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태국에서 낯익은 아내의 얼굴이 포착된다. 스튜어디스인 아내가 태국에서 만난 잘 생긴 남자(다니엘 헤니)와 놀아나고 있는 것. 그런데 정체 모를 상대는 테러의 배후에서 모든 사건을 조종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아내 구하랴, 외도할까 감시하랴, 테러 해결하랴, 철수의 동분서주와 그의 아내 영희의 좌충우돌이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무엇보다, 설경구와 문소리의 만남에 눈이 간다. 봉준호와 송강호의 만남 만큼이나 뜻깊은 재회다. 둘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과 ‘오아시스’ 이후 10여년만에 한 작품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첫 두 작품에서 그 둘의 만남은 가슴 아팠다. ‘박하사탕’에서 역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남녀였다. 서로에게 돌아갈 수 없는 순수의 한 시절을 상징했다. ‘오아시스’에선 어떤가. 세상이 바깥으로 밀어버린 존재, 세상이 버리고 오해했던 연인이었다. 10년후 그들은 능청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중년의 부부를 연기한다. 한 촬영 현장에 다시 모이기까지 제법 시간이 길었지만, 카메라보다 가까운 것은 술자리였다. 그동안에도 늘 이창동 감독과 문소리의 집이 있는 일산에만 가면 셋이 뭉쳐 소주 한 잔 걸치곤 했다. 틈만나면 타박하고 짖꿏은 수작을 거는 문소리나, 태연히 받아내는 설경구. 영화 속 둘의 모습은 술자리에서의 실제 그대로라는 것이 설경구의 전언이다. 영화는 허술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무엇보다 설경구와 문소리의 오랜 인연이 생활처럼 묻어나 빈틈을 메꿔간다. 인상 잔뜩 쓰고 용의자들을 윽박지르는 희대의 캐릭터 ‘강철중’도 제 옷이지만, 허허실실 아내를 구슬려가는 ‘허당’ 스파이도 설경구에게 썩 잘 어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