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영상 기자]옛날에 바둑판에만 앉으면 줄담배를 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가 막히면 하릴없이 연기만 뿜어대던 그. 그리곤 비비꼰 다리를 덜덜 떱니다. “다리 떨면 복 나간다”고 집에서 혼날법도 했을텐데,, 그는 그러지는 않았나 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혹 대마라도 위협받는 한 수를 당했을땐, 세상 고뇌 다 짊어진 사람처럼 ‘악, 헉’ 소리를 내며 엄살이라는 엄살은 다 떱니다.
그런 그에게 상대방은 담배 연기 때문에, 엄살 때문에, 끊임없이 떠는 다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는 나중엔 담배를 끊었지요. 골초 중의 골초가 어느날, 금연전도사로 변신한 것을 보고 웃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랬지요. 바둑에서의 집중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담배를 끊었다고. (훗날 금연세상이 되면서, 어느 올드바둑팬은 그때 골초의 그가 그립기도 하다는 얘기를 하긴 하더군요)
이상 얘기한 사람은 ‘바둑의 황제’ 조훈현 9단입니다. 조훈현? 두말할 필요 없겠지요. 그는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조남철 9단, 김인 9단의 뒤를 이어 한국 바둑계를 평정한 인물이죠. 아니, 앞의 이들보다도 조훈현 9단의 업적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우물안 개구리였던 한국 바둑을 세계 1등 바둑으로 올려놓은 사람이 바로 조훈현입니다. 그 앞에 서면 일본의 초강자, 중국의 초강자들이 추풍낙엽처럼 한방에 떨어져 나가곤 했지요. 바둑팬들은 당연 엄청난 희열을 느꼈죠.
그가 쉴새 없이 연기를 뿜어대는 골초였고, 시건방지게 다리를 덜덜 떨었지만 우리의 꼭 바둑팬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를 사랑한 이유입니다.
이런 조훈현 9단이 최근 통산 1900승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지난 2일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제7기 지지옥션배 여류대시니어 연승대항전 본선 17국에서 최정 3단에게 260수 만에 흑으로 반집승을 거뒀는데, 이게 바로 1900승째였다는군요. 이후 1승을 더 보탰는데, 무엇보다도 1900승을 돌파했다는 데 의미가 커 보입니다.
와, 1900승이라니요. 대단하네요.
프로 바둑기사의 1900승은 국내는 물론 세계 최초의 기록입니다. 위업이라고 할 수 있죠. 아마, 조훈현이기에 가능했던 일 같습니다.
조훈현? 한마디로 엄청난 국보급 기사입니다. 나중에 이창호 9단이 등장하고 나서 그의 스승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습니다만, 조훈현 기사의 실력과 재능, 천재성은 바둑의 역사를 확 바꿔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53년 3월10일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난 조 9단은 1962년 10월 14일 제16회 입단대회를 통해 아홉 살의 나이로 입단했습니다. 세계 최연소로 입단관문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그는 이듬해인 1963년 10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고(故) 세고에 겐사쿠 9단 문하생이 됐습니다. 당시 일본 바둑 명문가 문하생이 된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한국 기사 알기를 우습게 보기도 했으니까요. 그만큼 그의 뛰어난 천재성을 일본 바둑 명문가가 단박에 알아본 것이죠. 1966년 7월 일본기원 입단대회도 통과해 초단을 획득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시기는 조 9단으로선 절차탁마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군 입대 문제로 10년에 걸친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1972년 3월 귀국, 본격적인 한국에서의 바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공군 복무시절인 1974년 1월 20일 제14기 최고위전 도전기에서 김인 7단(당시)에게 승리를 거두며 첫 타이틀을 쟁취한 것을 시작으로 ‘바둑황제의 용틀임’은 시작됐습니다. 이후 이창호라는 제자가 브레이크를 걸기까지는 조훈현의 시대였죠.
국내대회 147회, 세계대회 11회 우승으로 총 158회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특히 1989년 제1회 응씨배에서 중국의 녜웨이핑(聶衛平) 9단과 겨뤄 3-2의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컵을 차지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별명은 ‘걸어다니는 기네스’입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최다대국(2719국)’, ‘최다승(1901승)’, ‘최다타이틀(158회)’, ‘단일기전 연속우승(패왕전 16연패)’, ‘한국 최초의 9단(1982년)’ 등 수많은 기록을 보유 중입니다.
영원한 승부사 조훈현 9단의 승부 세계는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지난 3일에는 제7기 지지옥션배 여류대시니어 연승대항전 본선 18국에서 김수진 사범을 꺾고 1901승을 거뒀죠. 앞으로 그가 승리는 최고의 최다승 기록이 계속 깨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훈현 9단의 인생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의 바둑에 대한 정열과 놀라운 집착력은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됩니다. 그 옛날의 공포스럽던 공격력과 재빠른(그의 또다른 별명이 조제비인 것은 그래서 붙은 것입니다) 행마는 조금 무뎌졌을지라도 바둑에 대한 그 열정은 ‘한물간 프로기사’ 소리를 불식시키고 있습니다. 승리 확률은 떨어졌을지라도 그 바둑의 깊이는 더 깊어진 것이지요.
우리가 경제적으로도 어려울때 일본이나 중국과 맞서서, 아니 오히려 뛰어넘으면서 당대 바둑을 이끌었던 조훈현. 그래서 민초들에게 희망과 꿈을 줬던 조훈현. 한때 얄밉도록(?) 승부에만 집착했던 그에게 거리감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젠 인생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반상에서 숙성된 열정을 뿜는 그를 오늘만큼은 찬사하고 싶습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 나이와 건강상 힘들겠지만 그가 2000승도 일구고 2100승도 일구고, 나아가 3000승도 일궜으면 합니다.
ysk@heraldcorp.com
■ 조훈현 9단 기록
-세계 최연소 입단 (9세ㆍ1963년 10월14일)
-한국 최초의 9단(1982년)
-전관왕 3회 기록(1980년 9관왕, 1982년 10관왕, 1986년 11관왕)
-최우수기사 통산 8회(1978∼1983년 6년연속, 89년, 94년)
-1994년 세계대회 사이클링히트 달성(90년 응씨배, 94년 후지쯔배, 동양증권배 우승)
-타이틀전 최다연패 기록 보유:패왕전 16연패(77년 13기∼93년 28기)
-은관문화훈장 서훈 (1989년)
-통산 최다승(1901승 9무 809패, 2013년 9월3일 현재)
-통산 최다대국(2719국)
-통산 최다타이틀 획득(158회-세계대회 11회 포함)
-타이틀전 최다 출전(235회)
